매거진 월요 책방

무진기행

각자의 이상이 뒤덮인 안갯속 동굴_무진

by 최전호

"김승옥"작가님의 소설 <무진기행>은 사실 이곳저곳에서 일부러 의식하지 않더라도 쉽게 전해 들을 수 있는, 쉽게 말해서 꽤 유명한 소설이다. 거기다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알쓸신잡"에서 살짝 소개되어서 다시금 인기몰이를 하고 있기도 하다.


기억을 되감아 필자가 소설 <무진기행>을 처음 접했을 때가 아마 수험생활을 하고 있었던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지루한 책상 위에서 그것보다 더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모의고사의 노란 시험지 위에서였을 테니 어느덧 15년 정도가 흐른 것이다.

당시 수험생활을 하는 누구나 그러했듯이 필자도 그 시절엔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요, 맞추어야 할 것은 문제였으니 필자를 스쳐 지나갔을 <무진기행>의 짧았으나 분명 아름다웠을 그 글들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도 어째서인지 소설 <무진기행>과는 연이 없었다. 언젠가 소설의 배경이 된 순천만을 여행하던 때 그토록 짙고 아련한 안개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봤으면서도 말이다.

무심했던 건지 무시했던 건지. 아니면 건방졌던 건지.

그럼에도 그럭저럭 삶은 순탄하게 굴러갔고 나는 적당히 잘 살고 있었다. 분명 세상에 읽어야 할 책들은 많지만,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책은 없으니까.

그런 어느 날 평소 필자의 매거진 <월요 책방>을 잘 읽어주시는 몇 되지 않는 독자 중 한 분이신 J(일명 지느님)님께서 <무진기행>을 선물해주셨다. 당신이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남자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고 하시면서 읽고 꼭 리뷰를 써달라고 부탁하셨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다.


J님 덕분에 책의 첫 장을 넘기게 되었고, <무진기행> 속 단어 하나하나,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며 그동안 왜 이 책을 읽지 않고 있었나 적잖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J님이 왜 남자의 관점에서 읽은 <무진기행>을 궁금해하셨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무진'을 찾아보기로 했다.




01. 한국의 대표적 감성적 작가_김승옥


책의 첫 페이지에 "김승옥"작가님은 자신이 생각한 소설의 정의를 적어 놓았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첫 페이지 "작가의 말"은 1980년에 적혔고, 소설 <무진기행>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

따지고 보면 "작가의 말"과 소설 <무진기행> 사이 긴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듯, 한 작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쉽게 변하기 어려우므로 우리는 김승옥 작가님이 설명한 "작가의 말"로 미루어 소설 <무진기행>이 어떤 관점과 사상이 녹여 쓰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겪어내고 있는 현재 진행 중의 삶 가운데서 발견한 인간관계와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는 모순, 그것들로 인한 혼란에 대한 판단을 미룬다. 다만 글을 읽는 독자가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의미를 발견하길 바란다.

그 의미들을 찾아가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무진기행>에 녹아 있다.


"김승옥"작가는 '전후 문학의 기적', '감수성의 혁명', '단편소설의 전범' 등 등장과 동시에 엄청난 찬사를 받은 작가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한국전쟁, 4.19 혁명 등을 겪으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탄생과 겪어낸 성장통을 함께 겪은 산 증인일 것이다.


일단,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

물론 '아름답다'라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의 다른 느낌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문장은 화려한 아름다움보다는 날카로운 아름다움에 가깝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실적 현상을 오래 관찰하고 그것에 엮여있는 감정을 세밀하고 자세히 묘사한다. 소설이라는 것이 분명 대리 경험을 제공하는 것일 테니, "김승옥"작가의 문장은 참으로 소설에 적합한 문장이라 하겠다. 길지 않은 문장을 읽음으로써 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해내는 힘이 그의 문장에는 있기 때문이다.


덤으로 <무진기행>을 읽은 다른 독자분들도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무진기행>을 읽으면서 "김승옥"작가의 문장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김훈"작가의 느낌을 받았다. 아니, 시대로만 따지면야 아마 "김훈" 작가님이 "김승옥" 작가님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두 작가님 모두 글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아름답다. 뭐 이건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이니 공감을 강요하진 않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느낌이 있다니까요. 정말로요..;;)




02. 남자의 관점에서 무진_동굴


우선, <무진기행>에서의 "무진"의 의미를 남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안갯속 도시 무진을 남자들이 종종 현실의 어려움과 고민으로부터 도망치는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문제에 과부하가 걸리면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심리가 있다.

남자가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은 회피나 잠적, 잠수와는 약간 다른 성질의 것이다.

타인의 조언이나 힘을 빌려 결론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자신만의 고민과 사고의 과정 끝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결론을 내리길 원하는 남자라는 동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설사 그 상대가 자신이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 그녀라 할지라도) 동굴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감히 그 동굴을 남자로서 존재하기 위한 필요악의 장소라고 말하겠다. 바람직한 장소는 아니지만 존재를 위해 꼭 필요한. 그리고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굴에 들어간 남자는 반드시 그 동굴에서 나온다.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남자는 돌아온다. 애초에 그 동굴의 입구와 출구는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분들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주세요.)


소설의 주인공인 윤희중도 비슷하다.

서울 회사에서 민감한 승진 문제를 앞두고 처와 장인의 권유로 짧은 휴가를 얻은 주인공은 무진으로 향한다. 그에게 있어서 무진은 일종의 안식처이자 피난처이다. 마음껏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렇게 늘어놓은 생각들이 비록 정리되지는 않더라도 밀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사유의 시간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윤희중에세 무진은 한 명의 사람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_12p


물론 주인공 윤희중에게 무진은 동굴의 의미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태생이기도 하고, 한 없이 쓸쓸했던 장소이기도 했으며,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이고, 자신의 치부를 숨겨둔 비밀창고이기도 하다.


짙은 안개가 걷히기 전, 모든 게 뿌옇던 무진은 윤희중에게도 그리고 그 시절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겪어냈던 1960년대의 누군가에게도 몽환적인 의미를 건넸을 것이다.




03.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다


무진으로 휴가를 온 주인공 윤희중은 무진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그녀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고 몸을 섞는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_41p


무진은 윤희중에게는 애증의 장소이다.

대학시절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25 전쟁으로 인한 의용군의 징발과 국군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무진의 작은 골방에 숨어 지낸다. 아들을 끔찍이 생각했던 어머니의 의지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시절 끝없는 비참함에 휩싸여 있었다. 비겁했고, 또 그 비겁함을 깨지 못한 자신이 끔찍했을 것이다.

후로 다시 도망치듯 무진으로 내려온 윤희중은 바닷가의 작은 방을 빌려 1년을 머물게 된다. 당시 그가 썼던 모든 편지에는 "쓸쓸하다"라는 말과 그것이 품고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 무진에서 그는 쓸쓸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말로 당시 윤희중의 무진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듯 무진은 주인공에겐 좋은 기억이 엮인 곳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무진을 찾는다. 그곳에 끌리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 무진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 아니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끌리게 되는 하인숙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윤희중과 다르게 하인숙에게 무진은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빨리 도망치고 싶은 곳이다. 하인숙에 윤희중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이곳 무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서울에서 성공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


무진은 성악을 전공한 그녀가 서글프게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불러야만 했던 곳이다. 그녀의 이상은 윤희중을 따라 서울에 가는 것이다. 서울은 그녀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 즉 대학생 시절 졸업 연주회 때 "나비 부인"중 "어떤 갠 날"을 불렀던 그 시절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인 것이다.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는 있지만 살아낼수록 더욱더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 서울의 생활 속에서 윤희중은 가난하고 쓸쓸했지만 순수했던 무진에서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무진에서만이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윤희중이 하인숙과 자신의 처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 더 깊이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하인숙은 윤희중에게 갈등의 계기만 제공해 줬을 뿐. 그 뒤의 문제들은 온전히 윤희중 자신만의 것이었다.


처에게 급하게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는 전보를 받고서 윤희중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선택을 한다. 물질보다는 스스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순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하인숙에게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을 전할 테니 꼭 서울로 올라와 달라고 편지를 쓴다.

그의 각오 또한 대단하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무진을 떠나 서울로 올라기가 전, 그는 결국 현실과 타협을 해버리고 만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그 시절 우리가 그랬다. 급속한 발전과 물질이 진실을 대변했던 60년대. 순수를 택하기에 현실은 잔인했고 물질의 풍요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덤으로 결론에서 만약 윤희중이 하인숙을 택했다면 독자의 마음이야 조금은 편했겠지만, 오래도록 기억되고 회자되는 지금의 <무진기행>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택하기 위해 현실의 풍요로움과 안정을 포기한 남자의 사랑은 멋있지만 조금은 뻔하니까.




04. 이상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이처럼 윤희중은 결국 무진을 떠나면서 과거의 자신을 선택하지 못하고 현실을 택한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_41p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필자는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이상을 떠나고 있습니다.'라고.


주인공은 하인숙을 남겨두고, 과거의 자신을 남겨두고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부끄러움은 여전히 윤희중이 자신이 바라던 이상이었던 무진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 타협해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일 것이다. 언젠가 무진의 골방에서 숨어 지냈을 때처럼 다시,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비참하고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이라는 것이 과연 고정된 것이고 불변한 것일까?

어쩌면 과거의 윤희중에게는 그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서울 생활이 그가 그리던 "이상"에 더욱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존재가 필연적으로 그런 것이다. 꿈꾸던 이상에 힘겹게 도착해보면 그것을 마음껏 누리지도 못하고 또 다른 이상이 찾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큰 무언가를 포기하고, 그것만큼의 무던한 노력을 통해 성취한 이상이 성취 뒤엔 깃털보다 가벼워져버린다. 자신 앞의 진실을 진실이라 여기지 않고 거짓이라 포장한다. 그리고 다시 거짓으로 포장된 다른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또, 이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하인숙에게 이상은 "서울"이었지만, 윤희중에게 이상은 "무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윤희중과 사랑을 나누고 난 뒤 하인숙은 느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인 서울의 윤희중은 자신과는 반대로 자신이 벗어나고 싶은 무진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윤희중에게 서울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무진에 머물고 있는 그동안만 멋진 연애를 하겠다고. 서울에서의 윤희중보다는 오히려 무진에서의 윤희중이 그녀가 그리는 이상에 가까운 사람임을 여자의 본능으로 느꼈을지도.

결국 서울이 아니라 무진이 이상인 남자가 힘겹게 머물고 있는 서울은, 그와 함께 할 서울은 그녀에겐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전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_39p


결국 닿을 수 없는 이상은 잔인하다. 또, 사랑하고 있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이상이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는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한없이 냉정하다.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므로 차라리 환각제에 가깝다.

이상을 좇는 인간이 가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주인 것이다. 평생 닿을 수 없는 없는 이상을 좇고 좇다가 결국 그곳에 도착하지는 못하고 언저리 어디에선가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 테니까.


우리의 이상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05. 비난이 아니라 연민을


주인공 윤희중은 결국 자신의 이상인 "무진"을 포기하고 무거운 책임감 속에 파묻혀 있는 장인과 처가 있는 현실의 영역 "서울"을 선택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집중한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은 이기적이다. 그 선택으로 인해 하인숙과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둘의 행위이므로 윤희중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하인숙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둘이 함께 만들었던 사랑에서 배재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윤희중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1960년대의 우리는 모두 다 그래야만 했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삶은 가난했고 사회는 팍팍했다. 이상을 선택했던 삶이 그것이 품었던 정의로움만큼 보상받지 못했었고, 오히려 꿈을 좇는 몽상가 취급을 당했다. 1960년대 "사회"라는 것은 개인의 이상을 할퀴고 상처 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며 근근이 현실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었다.

이상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상은 아예 없는 것 취급당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성공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우리 스스로 비참했던 "개천"의 삶을 인정해야만 했던,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윤희중에게 있어서 "무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지만 가난한 개천에서의 삶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힘들었고 가난했고 무기력했었다. 반대로 그가 택한 현재의 삶인 "서울"은 용의 삶인 것이다.


삶에서 큰 부분을 포기하고, 희생해서 서울의 삶을 선택한(과부와 결혼을 할 만큼. 과연 윤희중은 그의 처를 사랑했을까?) 그를 감히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제 자신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하인숙을 받아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언뜻 가해자는 윤희중이고 피해자는 하인숙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오히려 윤희중이 가엽게 느껴졌다.

헤어짐 뒤에도 하인숙에겐 여전히 "서울"이라는 이상이 남아있겠지만, 윤희중은 이제 이상조차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는 다시 무진에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필자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비록 잡을 수 없는 이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있다는 믿음 만으로도 우리는 힘겨운 몸뚱이와 지쳐버린 정신을 붙들어 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건만 그것조차 잃어버린 사람은 이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상을 좇아 이상의 앞까지 다가갔다가 결국 현실로 돌아서버린, 그래서 이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우리는 비난이 아니라 연민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윤희중이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06. 필자의 감상_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소설 <무진기행>에서 나오는 대립 요소는 바로 이상과 현실이다. 그것들이 "무진"과 "서울"이라는 장소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인공 윤희중이 바랐던 이상의 공간은 "무진"이었고, 그가 결국 사랑하는 여자 하인숙을 포기하고 선택한 현실은의 공간은 "서울"이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늘 그러하듯이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는 그것과 먼 곳의 이상을 지향한다.

속해 있는 곳은 현실이지만 현실을 부정하며 '언젠가'라는 환상을 뿜어내는 이상을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이 크면 클수록 그것처럼 살아내고 있지 못한 현실은 더욱더 힘들고 비참해진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상)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아이러니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바라고 바랐던 그 이상을 선택할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상황 앞에서는 정작 그것에 등을 보이며 돌아섰던 경험도 우리에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을 꿈꾸는 행위가, 설사 결국 다시 안정적인 현실을 선택했다고 해서 평가절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편을 가르고 그것을 명명하기를 원하는 사회는 이상 쪽에 치우친 사람을 몽상가로, 현실에 치우친 사람을 현실주의자로 몰고 가곤 한다.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감히 이상을 선택할 수 없도록 우리를 붙잡는 것이.

하지만 반대로 이상을 꿈꾸게 하는 것도 바로 현실이다.


"김승옥"작가가 소설 <무진기행>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공존이지 않았을까?

비록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택해야만 했던 1960년대의 우리들이 그래도 비겁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것 또한 충분했다는 말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어디인가?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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