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여성작가의 책을 즐겨보지는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남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성에 갇혀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터라, 반대의 성이(당연히 여성이) 지니고 있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육체적, 감정적 흐름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종종, 아니 꽤 자주 Y에게 핀잔을 듣곤 한다.
독서라는 활동을 통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당연히 주인공(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책 속에서 주인공이 겪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시켜보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판단과 결정을 내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인물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잡기도 하고 때론 그것을 놓쳐 책 속에서 방황을 하기도 하면서 능동적인 독서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배재된다면 독서라기보다는 단순히 활자를 읽는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에게 여성 작가의 책은 조금은 찾설고 조금은 어색하다. 이건 필자에겐 한없이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의 절반씩을 남성과 여성 양분하고 있을 것이고, 그 비율을 기반으로 여성 작가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면 필자는 세상 절반의 독서를 놓쳐버린 것과 같을 테니까.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나 슬픈 일이다.
그러니 시작의 말을 다시 바꿔 보면 "필자는 개인적으로 여성작가의 책을 즐겨보지는 못한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책장 앞에서는 주로 남자 작가들의 책을 집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에 스스로 만족하며 반대편의 아쉬움을 달래보곤 한다.
그럼에도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왜 일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첫 장을 넘겼을 때도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다.
'과연 내가 여성 작가의, 게다가 여성이 주인공인 책을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사실 반 반이다. 어느 부분은 격하게 공감이 되기도 했고, 어느 부분은 아무리 곱씹어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낀 주된 감정은 약간의 씁쓸함이었다. 사랑 앞에서 여자 주인공 폴이 했던 능동적인(혹은 스스로 능동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의 선택을 과연 나는 공감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은 혹시 능동적인 포기는 아니었을까? 사랑 앞에서 포기라는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뒤로 하더라도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둘러싼 여자와 남자의 복잡한 감정들. 그것들은 어쩌면 나도 겪어 봤고, 또 앞으로도 충분히 겪고 고민해야 할 감정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시대가 다르고 삶의 배경이 다르고 생물학적 성의 배경이 다르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느 방법이든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될 테니까.
생각해보면 사랑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상관이겠느냐. 사랑 앞에 자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흘러나오는 감정을 온전히 자신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 앞에서 언제나 약자이고 언제나 조마조마 마음을 졸여야만 했었다. 그것 앞에서 완전한 성공이라든가 아니면 만족이라는 감정을 느끼기엔 그것의 깊이가 너무 깊었고 일종의 바닥이 없는 우물과 같았다.
그래서 "프랑수아즈 사강"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풀어낸 사랑을 둘러싼 사람들의 미묘한 이야기가 좋았다. 옳고 그름으로 감정을 정의하는 것보다 어느 편이든 선택 앞에 이유를 만들어 주고, 그녀의 문체로 선택들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 점이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또 여성이지만 그 시절 상당히 독특하고 개성 있는 삶을 살아냈던 "프랑수아즈 사강"은 어느 정도의 남성성을 지니고 있었던 작가였다. 독립적이었으면 개성이 강했고, 사랑에 있어서도 수동적이기보단 능동적이었으며 삶의 중대한 선택 앞에서도(비록 타인의 시선엔 한없이 어리석어 보였을지라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서 그녀가 풀어낸 이야기가 조금은 더 깊게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1950년대의 우리나라라면 여전히 유교적 기반의 가부장적인 사고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였으니까.
말년에 코카인을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그녀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만약 그녀가 그녀 자신을 덜 파괴했다면 좀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테지만 이토록 깊은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사강"을 필명으로 삼았다. 필자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므로 그녀가 어떤 까닭으로 "사강"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삼았는지는 잘 모르게싿. 하지만 그녀 덕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장바구니에 담아 보았다.
당시 그녀의 집안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택에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고 그녀 자신도 공부를 꽤나 잘 하는 편이어서 소르본 대학(지금의 파리 대학)에서 수학을 했었다. 물론 중퇴를 하긴 했지만.
사강은 19세에 발표한 첫 작품인 <슬픔이여 안녕>이 꽤나 큰 성공을 거두면서 프랑스 문단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그 후 발표한 여러 작품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게 되지만 사실 그 후 그녀 자신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그녀의 말년엔 마약과 도박 그리고 탈세에 얼룩져 그녀의 작품만큼 그녀의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다시 한번 말 하지만 사강은 그 시절 여성이 걷는 일반적인 방향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살아갔으며 나름 그것에 책임을 지기도 했었다.
작가 본인의 삶과 작가가 작품에서 풀어낸 삶을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조금은 억지일 것이다.
사강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사랑을 믿느냐, 라는 기자의 질문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작품에서의 남 녀의 섬세한 감정을 담담한 문체로 표현해 냈으며, 그녀가 그려낸 사랑엔 항상 알 수 없는 미묘한 권태로움이 있다.
단편적으로 두 번의 결혼 생활의 실패가 그녀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사강은 왜 책의 제목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했을까?
게다가 마지막의 "..."은 사강이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나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책 제목의 명명 이유를 풀어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미루어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사강의 고향인 프랑스 사람들은 "브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건 아마 역사적 배경에 기인하리라고 생각한다. 브람스는 독일 태생의 음악가였으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의 것에 대해(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브람스의 음악적 분위기가 프랑스 사람들의 민족성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지도.
어쨌든 그런 까닭으로 프랑스에서는 브람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파티가 있다면 손님들에게 미리 브람스의 음악이 괜찮겠느냐고 양해를 구한다고 할 정도이다.
그럼 도대체 프랑스 태생의 그녀가 프랑스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브람스"를 떡하니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마도 그녀가 책의 제목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붙인 이유는 책의 내용을 실제 브람스의 사랑에서 모티브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폴과 시몽의 나이는 열네 살 차이이다. 여자인 폴이 열네 살 더 많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 브람스는 그보다 열네 살 연상인 자신의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평생 동안 사랑의 연정을 품고 살았으니까.
이 질문은 소설 속에서 시몽이 폴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 건넨 말이었다. 그리고 폴을 지루한 일상과 이미 익숙해진 로제와의 사랑에서 그녀를 꺼낸 질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견고했던 세상을 건드려 균열을 만들었든 말이다.
어쩌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실제의 클라라에게, 동시에 소설 속의 폴에게 주어진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열네 살이나 어린 브람스를, 시몽을 좋아하느냐고 말이다.
필자도 몇 번이나 책을 읽으며 이 질문들을 입에 머금었었으니까.
그래서 뒤에 "..."을 붙인 것일지도. 대답을 기다리는 초조함과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길 희망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으니까.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폴의 입에서 이 질문에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녀로서는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_9p
39세.
폴에게 사랑은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가 담긴 체념이자 그녀 혼자 견뎌야만 하는 고독이었다. 그녀의 연인인 로제는 이제 그녀가 한없이 익숙하기만 한다. 쉽게 말해서 로제는 폴에게 지루함을 느끼고 폴은 이제 로제의 지루함에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폴이 익숙한 로제는 젊은 여자를 찾아 바람을 피우며 그의 욕정을 푼다. 그러는 동안 폴은 깊은 고독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슬픈 것은 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신의 상황을 인정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로제와의 사랑을 다시 시작의 그것처럼 회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용기는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은 의뢰인인 부유한 미국인 부인을 만나기 위해 의뢰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집의 아들 시몽을 만나게 된다. 시몽은 스물다섯. 폴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남자다. 직업도 변호사로 반듯하고 외모는 그것 이상으로 더 잘 생겼다. 폴의 생각엔 시몽이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몽은 폴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그의 구애가 조금씩 폴을 흔들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그녀의 감정을 충분히 적셔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로제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이제 다시 자신을 흔들 사랑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시몽이 나타나서는 그게 아니라 자신도 있다고 폴으 앞에서 주장하고 있다.
폴이 사랑을 주고 있는 대상은 로제다. 그리고 폴이 사랑받고 있는 대상은 로제가 아니라 시몽이다. 그녀는 서로 다른 방향의 사랑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로제를 향한 기다림에 지치고 그의 무관심한 사랑에 외로운 폴에게 뜨거운 사랑을 안고 시몽이 다가온다.
그는 당연히 그녀 곁에 머물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여자를 안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걷고 싶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싶었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싶었다. 보도 위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싶었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도시를 살펴보고 싶었으며, 그러다가 어쩌면 늦은 밤의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강둑 끝의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_18p
로제는 폴이 익숙하다.
아니 어쩌면 이제 익숙하다 못해서 지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한눈을 팔더라도, 마음을 주지 않더라도,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언제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 폴은 로제에게 바로 그른 여자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 사랑이라는 그물에 갇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
남자의 사랑은 불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어 버린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곳인지도 모른 채 사랑하는 여자의 어깨너머의 다른 여자를 탐한다. 위태롭지 않은 사랑엔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것이다. 설렘이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로제는 폴이 다른 사랑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다시 폴을 잡기 위해 노력을 한다.
로제는 과연 다시 폴을 잡을 수 있을까?
"삶은 여성지 같은 것도 아니고 낡은 경험 더미도 아니야.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나는 당신이 자신을 천박한 수준, 이를테면 그 심술쟁이 할망구들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 우리의 문제는 로제뿐이야. 다른 건 문제 되지 않아."_133p
시몽의 폴을 향한 사랑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그는 온전히 집중 헤서 폴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녀만을 원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열네 살이라는 폴과의 나이 차이도 시몽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시몽은 자신이 폴을 향에 느끼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진실되고 솔직하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에 시몽은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사랑이 조금씩 폴의 마음을 열어간다. 시몽은 건넨 사랑에 대한 응답을 폴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
"잊지 않을 거야." 폴이 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눈길을 들어 올렸다.
"나 역시 잊지 않을 거야. 그건 다른 문제야. 다른 문제라고." 시몽이 말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 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뺴더니 짐을 놓아둔 채 나가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_150p
사실 필자는 책을 읽는 내내 책의 마지막을 짐작했었다.
왠지 폴과 시몽과 로제의 마지막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제발 필자의 짐작이 틀리길 바라고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의 책장을 넘겼었다.
하지만 결국 폴은 자신을 뜨겁게 사랑해줬던 시몽 대신에 로제를 선택한다.
그녀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이유는 자신의 늙음이었다.
폴이 말하는 늙음을 필자는 육체적, 물리적 늙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의 늙음이다.
25세인 시몽의 사랑엔 현재만이 있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만이 진실이고,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폴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39세 폴의 사랑엔 언제나 끝이 있다. 열정으로 타올랐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젠가는 식어 볼품없이 건조해진다는 것을 로제와의 사랑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폴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어느 누구의 노력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폴은 그렇게 자신에게 익숙한 사랑인 로제를 선택한 것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시몽의 진실되고 뜨겁고 저돌적인 사랑을 감당하기엔 자신은 이미 로제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진 현실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며 살아왔다.
또한 시몽이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지금의 뜨거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과 로제의 사랑이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고, 그 상처를 수면 위로 꺼내 놓는 것조차 지치고 힘겹지만, 그럼에도 로제가 자신의 삶에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던 것이다. 익숙함 또한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뜨겁게 시작했던 사랑도 결국 차갑게 익숙해질 것이라는 것.
솔직히 시몽의 사랑을 져버리고 로제를 선택한 폴의 선택을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건 글의 서두에도 말했지만 아마도 필자가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성 작가가 쓴,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에서 그녀의 선택을 100% 이해하기란 억지에 가까울 테니.
넘겨짚어보자면, 아마도 여자는 조금은 더 안정적인 사랑과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현실에 무게를 둘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나이도 있고, 직업적으로도 안정적이며, 어떤 형태 로든지의 애인이 있는 폴에게 사랑 말고는 모든 것들이 다 불안정한 시몽을 택한다는 것은 모험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험을 하기에 폴은 몸도 마음도 그녀의 말처럼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슬프게도.
누군가 나이를 먹는 게 무엇이냐 필자에게 묻는다면, 필자는 사랑을 하는 것에 망설임이 많아지는 것이라 하겠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이 25세에 발표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40세의 로제, 39세의 폴, 25세의 시몽이다. 나이만을 따지고 보자면야 사강이 온전히 경험하고 익숙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인물은 시몽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반대의 성이기 때문에(사강은 여자이고 시몽은 남자니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강은 놀랍게도 자세하고 심오하게 세 명의 인물의 감정을 풀어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사강이 훌륭한 작가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핵심은 변해가는 사랑의 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변화가 남자와 여자에게, 또 사랑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의 나이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다.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변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잔인하다.
그 변화를 직접 겪오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이 자명한 진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 변화를 알면서도 모른 채 할 수 있는 일종의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그런데 이건 괴로운 능력이다. 새로운 사랑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미리 끝을 짐작해 버린다. 그 결말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체념. 결국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도 변해버릴 것이라는 포기.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25세 폴에게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39세 폴에겐 눈 앞의 사랑을 바라보기보단 그것의 끝에 집중한다. 로제와의 6년간의 사랑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사랑이 익숙함으로 삶에 자리 잡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일 것이다.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그것들 앞에서 마음 졸이고 망설였던 무수한 시간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혹 내 옆의 사랑이 익숙함이라는 감정으로 날 괴롭히고 서로에게 설렘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변함없는 진실이 우리에게 익숙함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부분에서 필자는 폴의 선택에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부분은 격하게 이해되기도 했다.
분명 현실 속에서 우리도 그런 익숙함에 익숙해져 나름의 행복을 누리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누군가에겐 로제가 되기도 했고, 누군가에겐 시몽이기도 했을 것이다. 폴의 입장에 놓여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기도 했을 것이며, 반대의 선택지를 용감하게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면 "그래도 사랑이다, 혹은 사랑이었다"라는 결론을 맺게 될 것이다. 씁쓸했건 달콤했건.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