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어차피 제 인생이니까요
한 사람이 평생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만나게 되는 사람은 대략 3000명쯤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흠,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으로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지금껏 제가 만난(그러니까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관계 맺은) 사람들을 속으로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인생의 3분의 1 정도를 살았다고 하면(평균 수명이 약 90세쯤이라는 가정으로) 못해도 1000명쯤은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지만 184명쯤 헤아려본 뒤 그만두었습니다. 역시나 전 평균에 못 미치는 사람인가 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 나머지 2816명을 만나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바꿔 생각을 해보면 꼭 그렇게 많은(제 입장에선 말이죠) 사람을 만날 필요가 있느냐?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 조금 삐뚤어진면이 있거든요. 게다가 저는 시간이 많은 편이니 이런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입니다.
물론 만남이라는 것에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질이 있을 것이고, 제 경우엔 나이를 먹다 보니 만나기 싫은 사람들도 종종 만나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얼마의 사람을 만나느냐 보다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저는 내렸습니다. 전 3000명의 스치는 인연보다 단 열 명이라도 제 옆에서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좋거든요. 안 그런가요?
전 만나는 사람의 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 속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어 놓을 때면 정말이지 많이 망설이는 편이라 더더욱 만나는 사람들만 주야장천 만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너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부러 저를 꾸미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여전히 저에겐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그리고 종종 그런 사람들과는 자꾸만 불편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저는 자꾸만 저를 감추게 되고, 때론 그들로부터 제가 불편한 질문들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들은 저의 본질을 건드리는 질문입니다.
“아니, 왜 커피를 그렇게 진하게 마셔요?”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운다고요? 전 고양이를 도저히 못 만지겠던데…”
“그렇게 자꾸 멀리 떠나시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지 않아요?” 등등.
어쩌면 사소한 질문이지만 전 그럴 때마다 난감해지곤 합니다.
뭐라 대답을 해줘야 할지, 아니 저에게 대답을 원하고 하는 질문인지조차 모호한 그런 질문들에 전 저의 본질을 위협받는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땐 저는 습관처럼 침묵해 버리고 결국 분위기는 가라앉게 되어 버리죠.
결론입니다. 저는 평생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만날 자신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저의 본질을 이해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몇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한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은 이해나 용서, 묵인의 영역이 아닙니다.
다른 무언가와 충돌하여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본질적인 것은 그냥 본질적인 것이고, 충분히 스스로 존재해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의 본질에 시비를 걸면 그냥 속으로‘흥’ 하고 무시하시길.
그냥 그뿐이니까요.
*저는 가끔 저와 함께 살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들과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고양이가 알아듣건 말건요. 그런데 가끔은 고양이가 제 말을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역시 진심은 통하나 봅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