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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ul 21. 2019

놓고 온 것

이런 것쯤 괜찮다

아마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마음으로 내 마음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는 위로는 건네지도 받지도 못했다. 그러니 나는 그것이 물건으로부터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려 배낭을 꺼내놓고는 채 담지도 못할 짐들을 바닥에 잔뜩 늘어놓았다.

당장 다음 날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나는 내 앞에 놓인 짐들 앞에 난감했다. 하지만 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니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못하겠더라. 열아홉. 생에 첫 배낭여행은 역시나 어려웠다.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나보고 나가 있으라 하시더니 당신이 내 배낭을 직접 꾸려주셨다. 그리고는 이건 이럴 때 써라, 저건 저런 때 써라, 작은 메모를 하나씩 친절하게 적어주셨다. 어린 자식을 먼 곳에 홀로 보내는 어미의 걱걱정스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짐들 보다 배낭에 들어가지 못한 밀려난 짐들이 눈에 밟혔고, 결국 배낭을 다시 풀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와 풀어진 짐을 번갈아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한 숨 크게 내쉬며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어머니는 아셨을지 모른다. 결국 그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그 짐들 앞에서 어느 것을 넣고, 어느 것을 빼야 할지의 문제가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느냐의 문제 같았다. 아직 그것에 정답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계속해서 미루고 미뤘던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원히 미루고 싶기도 했다.

결국 짐은 늘었고 배낭은 무거워졌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간을 적당히 잘 지내다 돌아왔다. 있던 곳을 벗어나 먼 곳에 바라본 내 망설임이 보잘것없어 보였다. 결국 무엇이 날 그렇게 만들었느냐 하면은 어느 정도의 포기와 그것과 맞물려 또렷이 선명했던 여행의 순간들이었다.

눈앞에 놓여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듬고 가는 것과 내려놓아야만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 어쩌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 까지. 그러니 악착같이 잡으려 해도 안 되고, 아쉽게 놓았을 때의 후회조차 별 거 아니라는 것을 길 위에서 여행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인도에 갔다.

분명 꼼꼼히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두세 번은 확인을 하고 챙긴 짐인데.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겨우 도착한 목적지에서 난 면도기를 두고 온 걸 알았다.

까칠하게 자라 있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떠나 온 지 나흘쯤 되었겠구나, 싶었다. 면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울 앞에 섰는데 세면 가방에는 면도기가 없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갑자기 검게 자라 있는 수염이 제법 괜찮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턱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니 거울이 비친 내 모습이 스크린에 종종 나오는 배우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제멋에 빠져 있다가 면도를 안 하면 어때?라는 결론에 이른다. 퍽이나 이상하고 괴상한 논리인데도 스스로는 만족하며 그렇게 화장실을 나왔다.



괜찮다.

이런 것쯤 괜찮다, 싶은 것들을 하나 둘 늘려가는 것이 여행이니까. 여기서 지내는 얼마쯤 면도를 안 하면 또 어떻겠는가. 여기서 난 멀쑥한 정장을 차려입을 일도, 근사한 넥타이를 멜 일도, 당신을 만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인도를 네 번이나 다녀왔지만 난 여전히 인도를 잘 모르겠다.

아니, 인도라는 나라 앞에 방문 횟수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건방져 보여 조심스럽다. 인도는 남은 생의 얼마 정도를 떼어내어 살고 싶은 곳이다. 놓아버린 것도, 움켜쥐는 것도 없이 가볍게 사는 사람들의 나라이니까.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면도를 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다. 그저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면도크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이런 것쯤은 괜찮다.



조금은 적당히 비워진 마음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게 되기도 하고, 희미한 시야에도 잡히는 분명한 몇 가지가 있는 것이다. 달라진 환경에 헐렁한 상태로 얼마간 머물다 보면 애썼던 것들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불확실성으로도 연명할 수 있는 것이 꽤 많고, 그것들을 얻는 것은 낯선 길 위가 차라리 쉽다는 것 까지.

이 벅찬 모든 것들을 놓고 온 면도기 하나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제는 제법 가볍게 가방을 싼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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