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좋아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좋아하기도 했거나와 딛고 있는 현실이 분명 힘들기도 했으니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 것처럼 나는 현실이 아프면 여행을 찾았다. 여행은 어떤 처방전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반복되기만 하는 모든 것엔 그 반대편 그늘이 있기 마련이었다.
반복되는 여행엔 익숙함이 생겨버렸고, 그 익숙함의 그림자는 지루함이었다. 떠나와서조차 여행이 지루해질 때 나는 종종 마음을 허해졌다.
채우려 떠나왔지만 걸을수록 공허해지고 마는 것.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번도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아낸 적이 없으므로, 여행 중 이런 감정은 꽤나 난감한 일이다. 그렇게 한 번 마음이 허해지기 시작하면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 멈춰 서버리곤 했다. 깊은 우물 속 그것의 밑바닥까지 확인시켜주겠다는 듯 공허한 마음은 나에게 고약했다.
그것은 배고픔의 허기와는 또 다르다. 육체의 허기야 무엇이든 몸에 채워 넣으면 해결이 되겠지만 마음의 허기는 음식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불가능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해 보고 대화를 나눠보기도 하지만 그것에도 역시 한계는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시기가 오면 결국 ‘이건 온전히 나만의 문제야’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이므로 노력은 무의미하다. 나는 나만의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는 숙소에 틀어박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다.
날이 어두워지고 빛이 희미해지는 저녁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조용히 엽서를 쓴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가 아니라 나에게 보내는 엽서를.
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마음에 들었던 도시에 대해서 쓰기도 하고, 불현듯 생각난 당신에 대해서 적어보기도 한다. 어제저녁에 먹음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든가, 나에게만 불친절한 것 같은 숙소 직원에 대한 험담을 몰래 늘어놓아도 본다. 새로 사귄 친구가 나에게 해줬던 칭찬을 옮겨 적고는 혼자 멋쩍게 웃기도 했다.
그런 여행의 한 귀퉁이를 작은 메모로 기록해서 여행을 끝냈을 나에게 보내는 것이다.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것일 수도 있고, 일상으로 돌아간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여행 중 내가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그 엽서들은 나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해 나를 따듯하게 맞이해주기도 하고, 때론 나보다 늦게 도착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엽서에 얽힌 여행의 기억들이 하나 둘 모여 이제는 책상 서랍을 넉넉히 채우고 있다. 서랍이 나만의 여행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방 한 귀퉁이에 나만의 여행지를 숨겨놓은 기분이 들어 혼자 몰래 기뻐하기도 했다.
떠나온 이들은 여행 중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모은다. 찾고, 수집하고, 얻어낸 뒤 흐뭇하게 웃는다. 담뿍 행복해한다. 어느 여행자는 그 나라의 우표를 모았다. 또 다른 여행자는 버스나 기차, 비행기의 티켓을 모으기도 했다.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볼 수 있다며. 자기가 마신 맥주병에서 상표를 떼어낸 뒤 그것들을 모으는 여행자도 있었다. 자신은 사람을 모으고 있다며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여행자도 있었고, 그 나라의 흙을 조그만 병에 담아 가는 여행자도 있었다. 언젠간 전 세계의 모래를 모아둔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만들고 싶다며.
트리니도 무언가를 모으는 여행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조금은 특이하게도 자신이 먹은 음식들의 계산서를 모았다. 무엇을 먹었는지 음식의 이름이 그 나라의 문자로 적혀있고, 그것의 가격도 적혀있는 계산서들. 때론 식당의 상호명이 적혀 있는 꽤 그럴듯한 계산서도 있었고, 아무 종이에나 적어서 적당히 찢어 건네준 허름한 계산서도 있었다. 트리니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자신의 여행 다이어리에 붙여나갔다.
“우리 엄마는 세상 즐거움의 절반은 먹는 즐거움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난 항상 내가 뭘 먹었는지, 그 순간 나의 즐거움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계산서를 모으는 거야. 나중에 그렇게 모인 계산서들을 보면 내가 뭘 먹었는지가 생각나고, 뭘 먹었는지가 생각나면 그날의 공기, 냄새, 나의 기분 같은 것이 전부 생각이 나거든. 그럼 다시 한번 그 나라를, 그 도시를 여행한 기분이 돼. 내 여행의 즐거움의 절반도 역시 먹는 것이거든.”
그녀는 계산서를 자신의 다이어리에 붙인 뒤 그날의 기분을 적어 내려갔다.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여행의 절반을 맡겨 버리는 트리니. 그래서 가끔 그녀를 따라다니면 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다거나 끼니때가 되면 괜히 트리니의 방문을 노크한 적이 많았다. 물론 난 계산서를 모으지는 않지만 말이다.
길 위의 여행자들은 종종 마음이 허해지고, 그럴 때면 자신만의 무언가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건 낯선 곳에 홀로 놓인 자신을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생경한 곳에서 자신에게만 익숙한 무언가를 모아가는 것. 그렇게 모인 것들을 여행에서 좀 더 많은 일들을 만들어 낸다. 나와 같은 취향의 여행자를 찾아내기도 하고, 다른 여행자의 취향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무언가를 알려줄 수도 있고,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건 아마 그 사람 자체일 것이다. 그 사람의 여행일 것이다.
흩어져있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결국 하나의 온전한 스스로를 완성하는 것. 그것은 분명 무언가를 모으는 사람들의 여행 방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해나가고 있다.
먼 곳의 나도, 나와 먼 곳에 있는 당신도 말이다.
그러니 낯선 길 위에서 마음이 허해진다면 무언가를 찾고 모아보자. 그것들로 차곡차곡 배낭을 채워보고 마음을 달래 보자. 그래서 우리가 여행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다시 여행을 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