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꽤나 오랫동안 인도의 바라나시에 머문 적이 있었다.
풀어놓은 가방을 다시 싸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터라 여행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편이긴 했지만, 바라나시는 내 게으른 성격을 뛰어넘어서 나를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인도의 바라나시를 여행해 본 여행자라면 분명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충분히 말이다.
나는 이왕 이곳에 오래 머무르기로 했으니 진득하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에 있는 젬베 학원엘 다니기로 했다.
아니,
여행까지 와서,
그것도 젬베가 인도 전통악기가 아님에도,
굳이 바라나시에서 젬베 학원을 다닐 필요가 있느냐 물어본다면 사실할 말은 없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해 버렸는걸. 하지만 역시나 여행이 점점 일상이 되어 버리려 하는, 약간은 지루해지는 시점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라나시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으니까.
마침 점심을 먹다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남자애가 꽤 괜찮은 젬베 학원을 나에게 소개하여줬고,
자기와 같이 배운다면 가격이 좀 싸진다며 나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기도 했으며,
아마 그가 프랑스 남자가 아니라 프랑스 여자였다면 더욱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불어가 꽤나 매력적이었으므로,
결국 나는 프랑스 친구와 함께 젬베 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젬베를 배우면서 프랑스 남자애와 친해진다면 지금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프랑스“여자” 여행자들과도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역시 난 프랑스 여자를 정말이지 “꽤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사실“배운다”라는 행위 속에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함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긴 하겠지만, 나의 경험을 되돌아봤을 땐 꼭 시간이 많아야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닌 듯도 했다. 오랜 시간 무언가를 배워도 결국 손에 잡히는 어떤 것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짧은 순간 스치듯 전해져 온 무언가가 오래도록 남아 꽤나 유용하게 쓰이게 되는 경험도 나에겐 있었으니까. 그러니 시간이 많은 여행자도,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도 분명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나는 전날 정한 약속시간에 프랑스 남자애를 만나 함께 젬베 학원엘 갔다.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선생님은 꽤나 있어 보이는(그러니까 몸 전체에서 예술가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중년의 인도 남자였고 수업은 원래는 일대일로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가격을 좀 깎는 대신 함께 배우게 됐다.
수업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각각 한 시간씩 이루어지는 방식이었고, 사용하는 악기는 학원에서 대여를 해주었다. 선생님은 젬베의 리듬 악보를 노트에 적어주고는 그 리듬을 우리 앞에서 두세 번 연주해주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턴 악보를 보며 개인 연습을 하는 방식. 선생님은 우리의 악기 소리를 들으면서 넌지시 몇 마디씩 던지며 일종의 교정을 해주었다. 아마 여전히 인도의 대부분의 교육시스템은 이런 도제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제 방식의 수업은 나에겐 적당했지만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 뭔가를(악기를 잡는 자세라던가 젬베를 두드리는 위치라던가) 교정해줄 때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프랑스 친구와 함께 새로운 리듬을 배우기 시작할 때가 문제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하고는(물론 영어로) 잘 알겠느냐 한 번 되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부터 연습이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 난 선생님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나 영어, 그리고 인도식 영어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함께 배우고 있는 프랑스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면 어쩔 수 없이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나는 성격상 되묻는 걸 잘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영어를 꽤나 잘했고(매번 똑같은 수업방식을 영어로 설명했을 테니), 프랑스 친구도 영어를 꽤나 잘했고, 나만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여행 중에 언어의 장벽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꽤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 장벽이 여행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나 같은 경우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30% 정도밖에 영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괜찮다. 30%의 진심만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나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능숙하므로(50% 정도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는 그래도 좀 괜찮은 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장벽을 만나더라도 어느 정도“적당히” 여행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젬베를 배울 때처럼, 선생님의 말을 50% 이상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리듬을 연주해야 할 때는 종종 난감해지고 만다.
나에게 타국의 언어는 약간의 불안함이다. 해야 할 말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므로 오해를 쌓아가기도 했고,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하므로 무심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해 타국의 언어를 완벽에 가깝게 습득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어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배우기 위해 책상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하더라고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나라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의 삶을 쌓아가야만 그 나라의 언어도 내 안에 쌓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완벽하지 않은 언어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약간은 불안한 여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불안함 들이 건네는 적당한 긴장감과 오해들이 반대로 나의 여행을 알차게 채워나간다고 믿는다.
내가 표현해내는 언어라는 것이 나 자신을 온전히 대변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 때문에 나는 나의 불안한 외국어도 괜찮다 싶다. 비록 젬베를 “잘” 배우진 못했지만 그 시간을 꽤나 즐겁게 채워나갔고, 프랑스 친구의 “프랑스 여자” 친구들과도 친해졌으니 말이다.
세상에 몇 가지쯤 불안한 걸 손에 쥐고 살아야 그래도 좀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불안한 언어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불안함이 알차게 채워줬던 내 바라나시 여행처럼.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