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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Jun 09. 2019

머물러있는 추억

슬프고 미안한 사람

"삶은 빈약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온전하다."


삶이란 말도, 빈약하단 말도, 온전하단 말도, 그리고 그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말에는 더더욱 무지했던 여덟 살의 나였다. 대신 여덟 살의 나는 빈약했으므로 그 말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했었다.

후로 살아냈던 삶은 켜켜이 쌓여갈수록 그것들 사이의 벽을 만들었다. 벽들은 관계를 거짓으로 꾸미고, 나는 그 거짓들로 꾸역꾸역 살아야 했다.

외조부가 내 일기장 한 귀퉁이에 적어놓았던 말은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이해가 된다. 아니, 삶이 빈약하단 말만 이해하겠다. 온전하단 말엔 여전히 의심을 남겨두기로 한다.



담불라에 머무는 내내 비가 왔다. 덕분에 비를 실컷 맞고 돌아다녔다. 우산은 없었고, 이곳에서 우산이 파는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쏟아지는 것에 이유가 없다면 받아내는 나에게도 이유가 없어도 된다. 이유 없이 이어지는 것이 삶이고, 여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은 괜찮아졌다. 비에 젖은 옷이야 해가 비추면 금방 마를 테고, 그러면 다시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다. 


꾸준히 걸었다. 무엇에든 빠른 것엔 재능이 없는 나는 걷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걷다가 날 잡아둔 풍경에 잠시 멈춰서 보기도 한다. 카메라를 꺼낼까 하다 그만둔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마음이 엮이면 아프다. 엮인 마음이 만들어낸 시간의 공백은 금세 벽을 만들어내고, 그러므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런 것들이 몇 개 있다. 머물러있던 마음이 엮이고, 메꿀 수 없었던 시간의 공백 때문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돼버린 풍경들.

그 순간들에 쏟아부었던 마음을 조금은 남겨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삶이라는 게 최선을 다한 마음에 자주 등을 보인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어리석은 지침으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가진 마음의 양을 알고 싶다. 

나에게 향한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고 싶다. 

능숙하게 건네고 태연하게 무시하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치밀하게 계산해서 냉정할지라도 잘 살고 싶다. 잘 사는 방법이 비겁하다 손가락질받아도.

살아가는 일이 머물렀던 순간에 묶여있는 마음들을 쌓아가고, 다시는 그것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계속해서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이제는 그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조금 이른 시간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따듯한 사모사로 배를 채우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고, 창가에 자리를 잡은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비가 참 많이도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버스엔 손님이 별로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여행자는 나뿐이었고, 스님 두 분과 젊은 청년 두 명이 전부다. 출발 시간이 되자 아침을 맛있게 먹고 왔는지, 아니면 따듯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왔는지 버스기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버스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거친 엔진의 시동소리가 이동의 시작을 알려 준다. 그때 할머니 한분이 머리 위에 자신의 몸집만 한 짐을 이고는 급하게 버스에 올라타셨다. 나는 놀란 눈을 껌벅 거리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놀라운 능력이다. 어떻게 이리도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저렇게 큰 짐을 머리에 이고도 중심을 잃지 않은 채 걸을 수 있는지. 그렇게 머리 위에 어마어마한 짐을 지고 버스를 타신 할머니는 내 앞자리에 짐을 풀고 않으셨다. 


버스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자리를 잡으신 할머니는 버스가 이동하는 내내 짐들을 버스 바닥에 풀어놓으시더니 하나하나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그 크기만큼이나 역시 할머니의 짐은 많았고 각양각색의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중 가장 눈의 띄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이었다. 남자아이가 가지고 놀만한 자동차부터, 여자 아이들을 위한 인형까지. 동화책에 스티커, 장난감 칼에 알록달록 예쁜 옷들도. 그러니까 할머니의 짐은 도무지 할머니의 짐이라고 할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손자, 손녀들을 위한 선물 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니 저렇게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시고도 저렇게 따듯한 미소를 보이시는 것이겠지. 

할머니가 머리에 이신 건 어쩌면 짐이 아니다. 그건 손자 손녀를 향한 사랑이고 기대고 떨림이다. 



내가 가장 따랐던 분은 외조부였다. 손자 중에서는 내가 막내 축에 속했기 때문에 외가에 가면 많은 귀여움을 받았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친가와는 다르게 시골에 있는 외가라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자연에 가까워지면 마음이 넓어지고 편안해지기 마련이니까. 어린 나이임에도 나는 자연이 보듬어주는 따듯한 품을 알았었나 보다. 

내가 아홉 살 때 외조부는 돌아가셨다. 당시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당신께 쏟았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리라. 

당신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당신께 묶여있는 내 마음들. 그리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건넸던 마음들이 나를 떠나 당신과 함께 어딘가에 묻혀 버렸다는 것도 어린 나이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종종 외조부의 커다란 손을 잡고 논두렁 길을 걸으며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농사를 짓는다는 건 사람을 키우는 것과 같단다.”

깊은 눈으로 넓게 뻗어있는 논을 바라보시며 외조부는 말씀하셨다.

“그럼 저 벼들은 몇 살이에요?”

나는 아직은 여물지 않은 푸른 벼들을 바라봤다. 저 벼들도 가족이 있겠구나. 부모가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곧 있으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겠구나 생각했었다. 농사를 짓는 것이 사람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할아버지는 벼에서 아직 여물지 못한 작은 쌀알들을 털어내어 내 손에 쥐어주셨다. 고사리 같았던 내 손에 쥐어진 까슬한 쌀알들을 나는 몇 번 움켜쥐었다. 내게도 자식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 논은 윗집 파란 대문 할아버지네 논이다.

저기 저 소는 아랫집 대머리 할아버지네 소란다.

나는 한 손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쌀알들을 움켜쥔다. 조용히 잰걸음으로 할아버지를 따라 발걸음을,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곳에서 할아버지랑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매일 과자를 사주겠노라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직접 농사지으신 귀한 햅쌀을 집에 보내주셨고, 나는 그 쌀로 지은 밥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방학하면 또 놀러 오란 말이 마지막이 되어 버려서 외조부는 나에게 슬픈 사람이다. 무언가 되갚기 전에 돌아가셔서 미안한 사람이다. 손자들을 위한 짐들을 사랑스럽게 정리하시는 저 할머니처럼 나의 외조부도 저 마음으로 농사를 짓고 손자의 방학을 기다리셨을 테다. 당신의 생엔 한 번도 방학이 없었을 텐데. 

이제는 당신이 머리에 이고 사셨던 그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다고, 당신이 일구고 키웠던 들녘의 벼들처럼 잘 자랐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이만큼 까지 온 것도 당신 덕분이라고.


“우리 강아지는 책 많이 읽어서 크면 할아버지처럼 농사짓는 농부 말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서 내 손을 잡은 당신의 손에 힘을 주셨다. 

할아버지 손은 쌀알들처럼 거칠었다.


버스에 앉아 바라본 창 밖 하늘엔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난 잠시 외조부를 생각해 본다. 계산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건넸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혼자 남은 나만의 몫이므로 난 종종 넘어지고 잘 살지 못하지만, 시간이 그 순간으로부터 꾸준하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나도 꾸준히 길을 걸을 것이다.


삶은 빈약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온전하다는 말.

꾸준히 걸으면서 이제는 온전하다는 말에 엮인 의심을 조금씩 풀어보고 싶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생겨 계산하지 않고 건넸던 그 마음들에 감사할 수 있길 바라본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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