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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Sep 22. 2018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묶여있습니까

마음을 데우는 음식

“오늘 저녁은 뭐야?”

습관이 되어버린 듯 나는 소파 옆자리에 앉아있는 알렌에게 물었다.

“secret.”

역시나 습관처럼 알렌의 대답은 단호하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웃으며 오늘 저녁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비밀이란 그의 말엔 비밀이지만 묘한 신뢰감이 있다.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믿어보란 말이다. 그리고 기대해도 될 것이라는 자신감도 함께 그것엔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난 잠자코 기대하고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시간이 즐거울 테니까.

나는 혼자 밥을 먹는 걸 잘 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모여 나에게 떠넘긴 일종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런 재능이 나에게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혼자 여행을 하는 나는 당연히 혼자 밥을 먹는 일이 잦았다. 허기가 느껴질 때면 가능한 가장 가까운 곳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곳에서도 메뉴를 고른다거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허기만 없애면 되기에 아무 음식이나 뱃속에 집어넣는 기계적 행위에 가까웠다. 

문득 그것이 조금은 슬퍼졌을 때, 그러니까 아무리 밥을 먹어도 혼자 먹는 밥은 더 이상 배부르지가 않았을 때, 난 이제 여행을 그만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까지 해버렸으니 이건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혼자 밥을 먹는 것처럼 혼자 하는 모든 것엔 슬픔이 배어있다. 꾹꾹 눌러 담아 감춰보지만 슬픔이 쌓이고 쌓여 결국 넘쳐버리면 그것의 곱절만큼은 더 슬펐다. 그래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어쩌면  혼자 사랑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감추면 감출수록 슬퍼지고, 슬퍼지는 만큼 그것 자체로 쓸쓸해져 버리고 마니까. 무엇보다도 슬프고 쓸쓸하다고 해서 밥을 먹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멈출 수는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 

그래, 나도 언젠가 당신을 혼자 남겨뒀었다. 혼자 남겨진 당신도 혼자 밥을 먹었을 것이고, 멀리서 혼자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지금 혼자 밥을 먹는 슬픔은 내 책임이고, 나는 그것 역시 혼자서 견뎌야 했다.

세비아의 구석진 골목에 자리한 이 숙소는 여행자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해준다. 그것도 공짜로. 그럴듯하게 차려진 저녁식사를 비슷한 색깔을 지닌 여행자들이 함께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다. 즐거움을 넘어서 행복에 가깝다. 그 행복은 혼자 남겨져 혼자 밥을 먹어야만 하는 나를, 그래서 무엇에도 묶이지 못한 채 방향을 놓쳐버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행복의 냄새를 맡게 하고 이곳에 머무르게 했다. 그 모든 행복을 만들어준 이곳의 요리사가 바로 알렌이었다.


“어제 먹었던 크림 파스타 말이야 정말 맛있었어. 버섯을 넣어서 그런가?”

“그래? 그런데 음식이 좀 많이 남아서 기분이 좀 그랬었는데...”

“하지만 난 너무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는 걸? 게다가 네가 직접 만든 상큼한 오이 피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고.”


알렌의 요리는 정말 훌륭했지만 알렌은 우리 어머니만큼 손이 커서 매번 차고 넘치게 음식을 만들어버렸었다. 어머닌 사랑도 음식도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마음이 따듯해서 그런 것이란 말도. 나의 어머니처럼 알렌도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따듯한 마음에 우리가 부응하기엔 알렌은 정말로 엄청난 양의 음식을 만들어 냈으므로 종종 아니, 자주 잔반이 쌓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식구란 말을 좋아한다.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 끼니는 숭고하다. 식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에도 자꾸만 혼자만 살아가려 하는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준다. 그곳에서 생을 이어주는 음식을 함께 한다. 돌아섰던 마음을 다시 돌려놓고, 잃었던 것들을 되찾아 단단히 굳어버린 마음을 녹여 준다. 

식구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여행자에게 선물해준 알렌은 충분히 훌륭하다. 종종 쌓이는 잔반 따위야 식구를 향해 넘치는 알렌의 사랑을 증명해줄 뿐.


식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알렌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담긴 음식을 만드는 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태도는 부엌의 한 자리에 굳건히 서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음식은 맛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음식을 통해 건너오는 것은 맛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것에 담긴 마음이 느껴질 때야 우리는 비로소 식구가 될 수 있다. 식탁 위에 준비된 그 마음 덕분에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열리고 향하게 되는 것처럼. 그 숭고한 마음이 나는 좋은 것이다.

다섯 시가 되면 알렌은 어김없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향한다.

“어디 가는 거야?”

물론 알렌이 매일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지 알면서도 나는 묻는다.

“장 보러. 지금쯤 가야 신선한 재료를 살 수 있거든.”

“그래도 저녁은 아홉 시에 먹잖아.”

햇살이 따듯하고 씨에스타가 있는 스페인의 저녁은 늦다.

“지금쯤 장을 보고 준비해도 시간이 빠듯해. 우린 big family잖아.”

“고마워. 항상.”

“뭘 이런 걸 가지고.”

어깨를 으쓱하곤 알렌은 야무지게 장바구니를 손에 쥐고는 문을 나섰다.


그날 저녁은 버섯 리소토였다. 

큰 테이블 주위에 식구, 알렌의 big family가 옹기종기 모여 앉으면 알렌은 뉴스 진행자처럼 오늘 자신이 준비한 음식 소개를 한다. 매우 진지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의 재료를 설명하고 어떻게 조리했으며, 채식주의자를 위해 따로 준비한 음식도 설명한다. 부엌에 여분의 음식이 충분히 많이 있으니 부족하면 더 먹으란 말과 함께. 그런 알렌을 보고 있노라면 난 먹지 않아도 충분히 배가 불렀다.


“오늘 저녁은 특별히 널 위한 거야.”

옆 자리에 앉아 밥을 먹던 알렌이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아침에 쌀이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쌀로 만든 요리 중에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게 리소토거든. 맛있게 먹어.”

알렌은 그날 아침, 쌀을 먹고 싶다는 나의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역시 마음이 담긴 음식을 만드는 건 분명 태도이다. 식구를 이해하는 태도. 기꺼이 사랑하는 태도. 그 태도들이 모여 마음을 만들고, 그 따듯한 마음으로 음식을 데운다.

나는 그 태도를 갖는 것에 자주 실패했었다. 근처까지만 가보려 아등바등하여도 그것 앞에서 그만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느 방향이었든 마음에 게을렀던 적은 없었는데. 자꾸만 당신과의 속도를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천천히 달아오르는 사람을 재촉했고, 이르게 따듯해진 사람을 식혀버렸다.

알렌이 만들어준 버섯 리소토를 꼭꼭 씹어 먹으며 나는 혼자만 살려 바둥댔던 삶을 멈춰 세웠다. 함께 저녁을 먹는 식구가 있는 이곳에서는 도무지 혼자서만은 잘 살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방법을 어렴풋이 배우게 된 것 같다.


"알렌. 오늘 네가 만들어준 버섯 리조또는 정말로 따듯해서 고마웠어. 내일은 같이 장 보러 가자. 너의 big family가."


설거지를 하는 알렌의 앞치마 주머니에 슬그머니 쪽지를 넣어두고는 나는 따듯한 리소토를 국자로 푹 퍼서 한 그릇 더 먹었다. 마음이 담긴 따듯한 음식을 먹을 때면 그 음식 속에 마음을 담은 사람의 우주를 느낄 수 있다. 알렌이 건네준 그 우주 속에서 나는 아마 계획보다 조금은 더 오래 이곳에 머무를 것 같았다. 이곳엔 나를 잡아주고 내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식구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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