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여름, 여름의 로마
이탈리아에 간 이유는 간단했다.
Y의 추천.
세상에서 가장 살고 싶은 곳은 이탈리아(그중에서도 피렌체)라고 습관처럼 주절거렸던 그녀의 강력한 추천(까지는 아니었지만)에 나는 유럽 대륙의 남쪽, 반도 국가인(같은 반도의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점은 여행 전부터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친숙한 편안함이자 거창하게 말하면 반도 국가라는 보트에 함께 올라 탄 운명 공동체랄까?) 여성의 롱부츠와 비슷하게 생긴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탈리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탈리아에 관한 책까지 한 권 펴낸 Y는 이탈리아로 향하는 나에게 로마의 몇몇 식당과 카페를 추천해주었다. 그녀는 책을 쓰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꽤나 유명한 카페나 식당을 정성스레 돌아다녔었고, 그곳에서 평소에 내가 먹기 힘든 음식들을 천천히 세밀하게 먹어봤다고 한다. 음, 조금은 부럽다. 더불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를 미간을 찌푸리며(굉징히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그녀는 상상력이 풍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성황이나 현상을 굉장히 생생하게 설명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음, 이 부분도 조금은 부럽다. 물론 난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기 때문에 다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 정도다.
-기차역, 버스터미널, 관광지에서는 항상 가방을 앞으로 메고 지갑과 핸드폰을 주의할 것.
(그녀의 말대로라면 여행자인 나는 여행의 모든 순간 가방을 앞으로 메고 다녀야 하겠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특히 더 조심할 것.
(예, 예. 알겠습니다.)
-1일 1 젤라토를 실천할 것.
(이건 좀 마음에 드는군요.)
기본적으로 저런 것들을 잘 지키면 로마에서 그럭저럭(이 말은 들을 때마다 그 기준점이 어디쯤일까 궁금합니다)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Y는 말했다.
어쨌든 나는 긴 비행시간을 잘 견뎌냈고, 마침내 로마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전 나에게는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었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전 이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나폴리의 얇고 날렵한 오리지널 이탈리아 피자(맛있겠지?), 그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골목을 거침없이 달리는 베스파, 시칠리아 배경의 영화 대부, 이탈리아의 열정적인 미인(이건 왜?)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충분한 매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탈리아의 열정적인 미인들이 있음에도) 이제야 내가 이탈리아를 가게 된 이유는 뭔가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나 사이에 엮인 강렬한 연결고리가 없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꽤나 긴 역사와 서사의 산물들을 숱한 전쟁과 종교의 갈등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냈고, 이제는 그것들로 역시 꽤나 굳건한(상당히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는, 바로 그 약간은 고집스러운 관념적 의식이 정작 나에겐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차라리 약간은 고집스러운 이탈리아를 향한 Y의 관념적 의식에서 비롯된 추천이 나에겐 더 결정적이었다,라고 말하면 좀 지나칠까요?
어쨌든, "뭐, 네가 그 정도까지 말한 걸 보면 그곳에도 분명 뭔가가 있긴 있겠지." 정도의 수긍이었다.
그런 약간은 고집스러운 Y의 관념적 의식에서 비롯된 추천을 타고, 는 아니고 비행기와 공항철도를 타고 나는 로마의 중심부 테르미니역에 도착했다.
한참 여름의 가운데를 통과 중인 로마의 더위는 충분히 예상을 했지만 견뎌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하는 나에게도 2018년 여름의 한가운데, 커다란 돌 하르방처럼 떡 하니 버티고 서있는 로마의 더위는 아무리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18년 로마의 여름은 엄청난 폭염을 기록했고(매일매일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웠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처럼), 로마 사람들 조차 이 시기엔 더위를 피해 시원한 북쪽이나 수영을 할 수 있는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니 말 다했지.
결국 로마에 고집스레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나 같은 여행자 아니면 나 같은 여행자를 상대로 '이번 여름만 잘 버텨보자고.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운 여름에 로마에 오는 거지?'라는 마음과는 반대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여행객을 맞이하는 관광업이나 요식업 종사자뿐이었다.
로마의 거리 위, 형체는 없지만 그 존재감만은 확실한 더위는 거리를 달구고 공기를 데웠다. 들숨 때 폐 속을 파고드는 후텁지근한 공기는 물론이거니와 정수리를 태울 듯 내리쬐는 태양은 흡사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대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꽂아대는 장대처럼 강렬하게(존재의 의미와 의지를 확실히 담아서) 내 정수리를 향한다. 여행객은 로마의 거리 위에서 무방비로 강렬한 장대에 노출당한 채 그늘을 찾아 헤매거나 연신 손부채질을 해댈 뿐이었다.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도 소용없고 야심 차게 발라댔던 선크림은 땀과 함께 흘러내릴 뿐이다.
그래 더위는 예상하고 대비했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포기에 가깝다)하다고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더위만큼 치명적인 것은 바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관광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운 여름에 도대체 왜 로마에 몰려든 것일까(나도 그중 한명일 테지만).
물론 사정만 허락한다면(그 사정이랄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나의 부지런함이다)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녘의 시간을 선택해서 콜로세움이건 판테온이건 트레비 분수 건 방문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플랑크톤 같은 신세는 면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눈이 떠질 때 일어나 따듯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결국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잠이 쏟아지고 마는 나라는 사람은(게으르단 말의 서정적 표현입니다) 결국 엄청난 관광객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저곳들을(그리니까 콜로세움이건 판테온이건 트레비 분수 건) 스치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로마의 여름은 그 강렬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혹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려 게시판 앞에 몰려드는 학생들을 구름 떼처럼 유인하는 게시판 위의 시험 성적처럼 견딜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 몰려든 대부분의 학생들은 크게 한 숨을 내쉬며 "이번엔 틀렸군."이라고 주절대며 상심한 얼굴을 한 플랑크톤이 되어 파도에 휩쓸려 다니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아이폰의 구글맵에 오늘 갈 곳을 표시하고 그것들 사이의 최단거리 루트를 짜는 일이었다. 그 루트 사이에 Y가 알려준 카페와 식당의 리스트를 참고해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도 정한다. 물론 음악 보관함의 플레이 리스트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길을 걸으면 조금은 불편한 호객행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으니까.
대충 이 정도의 준비를 끝내고, 어느덧 익숙해진 더위와 수많은 인파에도 가볍게 안녕을 건넬 수 있는 넉넉한 마음까지 장착을 한 뒤 나는 로마에서의 일정을 시작한다.
그것이 로마의 여름이다. 아니, 여름의 로마.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