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의지
뭐 일단은 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로마의 몇 곳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일단은, 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 목적 외에 다른 건 없으니까요. 어떤 형태로든지 장소라고 명명된 곳에는 대지가 있습니다. 그 안엔 강도 있고 산도 있고 습지도 있을 테죠. 그리고 바로 그 대지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처음엔 그 숫자가 적었겠지만) 옹기종기 모여서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가정이건 마을이건 도시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간다,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요즘엔 살아간다, 라는 말 자체로도 충분히 대단하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대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거든요.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삶이라는 게.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더 말이죠.
서론이 길었지만 로마라는 장소도 단단하고 견고한 대지 위에 있습니다. 당연하죠. 수중 도시나 하늘 위에 떠있는(SF영화에 종종 나오는) 도시는 아직까지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그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되었든 그 단단하고 견고한 대지에 깃든 강한 의지(비슷한 것에)에 일종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존재의 근원이자 뿌리 같은 것. 그것에 대한 대가로서 세금(같은 것) 정도랄까? 물리적으로도 그렇겠지만 정신적으로도 말이죠. 그리고 그 세금은 저 같은 뜨내기 여행자라고 해서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저희 세금 징수(같은 것)의 명단에 없군요. 뭐, 일단은 지나가십시오. 우린 여행자는 일일이 상대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간 꼼꼼한 세금 공무원처럼 안경을 고쳐 쓰며 리스트에 없으면 추가해서라도 꼼꼼하게 빚을 받아냅니다. 가끔은 가산금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나라고 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여행자(주제에)가 그것을 무시한 체 태평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말 그대로 그 세금이라는 건 좀처럼 발을 떼지 않는 저를 뒤에서 강하게 푸시합니다. "이봐 이봐, 여행자 양반. 오늘 당신이 내야 할 세금인 이 정도의 걸음과, 이 정도의 대화, 이 정도의 장소에 다녀와서, 이 시간 전에는 숙소에 들어오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이죠.
모든 도시가 여행자에게 어느 정도의 푸시야 하겠지만, 로마의 경우는 좀 더 강했다, 라는 느낌입니다. 마치 저처럼 게으르고 태만한 여행자들을 여럿 상대해봤다는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매우 능숙하고 기민하게 푸시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푸시에 떠밀려 마지못해 발을 떼는 저를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령 따윈 나에겐 안 통해, 라면서. 그러니 저라고 해서 당해낼 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꽤나 대범하고(어떤 면에서만) 약간은 감각이 무딘 편입니다. 그래서 종종 장소에 깃든 의지가 나에게 징수하는 세금 따위(어떤 형태든)는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태평하다면 태평하고 게으르다면 게으른 것이죠. 무언가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고(그것도 미리 계획해서) 그것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여행은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거든요. 게다가 누가 뭐라 하든(그러니까 게으른 나를 재촉하거나 채근하는 푸시도)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닙니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니 이건 도무지 당사자인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대지에 깃든 의지가 나에게 뭐라고 하건 말건.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느낌이 달랐다고 할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생에 처음 밟아본 로마의 대지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매우 끈적하고 꼼꼼하게 저를 푸시했습니다. 이곳에서도 한껏 게을러져 보자, 라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 푸시에 나는 '흐음. 이번엔 쉽지 않겠군.' 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결국 한동안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배낭 깊숙한 곳에서 Y의 책을(저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추천한 그녀는 이탈리아 가이드북을 썼습니다) 꺼냈습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태평하고 게으른 저를 위해서 로마 챕터에 굉장히 자세하고 세세한(그러니까 꼼꼼한 세금 공무원처럼 저에게 상당한 압 밥 감으로 다가오는) 여러 메모들을 남겨놓았고, 전 못 이기는 척 그 장소들을 아이폰의 구글맵에 저장했습니다.
네. 그렇게 본격적인 로마의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로마는 이번 이탈리의 여행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마침점이었습니다. 입국과 출국 비행기 모두 로마 피우미치노 국제공항입니다. 때문에 처음엔 '어차피 마지막에 또 올 텐데..'라고 생각하며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라고 저는 스스로의 게으름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전 이탈리아를 떠나기 직전 로마에 머물면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게으름은 정말 게으름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전 달리 변명을 꺼내놓을 처지가 못됩니다. 무척이나 확실하고 견고하게(로마의 의지만큼이나) 전 게을렀으니까요.
구글맵의 지도를 통해 본 로마는 대체로 동그란 모양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보면 육각형 모양. 꽤나 균형 잡힌 모양이죠. 뜨거운 여름을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한 비치 보이스들의 몸매처럼(밴드 말고 정말 해변가의 남자들요). 물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당연히 완벽한 원이나 육각형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형태를 갖추기 위한 가상의 선 안쪽으로 들어온 지역도 있고 밖으로 벗어난 지역도 물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대략적으로 그렇단 말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동그라거나 육각형의 도시가 세상에 존재할리 없지 않은가요(아닌가?)?
일반적으로(제 추측이겠지만) 자연발생적인 도시가 이런 형태를(그러니까 동그라거나 육각형이라거나) 갖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꽤나 강력한 지도자가 선을 긋듯(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했던 것처럼) 지역을 구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마도 꽤나 긴 시간 동안 숱하게 많은 전쟁을 치러온 로마는 잘 갈린 칼처럼 효율적으로 전쟁에 임하기 위한 적절하고 유용한 영토의 형태를 구축해 왔을 테고, 그 노력의 결과가 바로 지금 로마라는 도시의 형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라고 추측해봅니다.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꾸벅.
다시 한번 서론이 좀 길었지만, 본격적인(이라고 말하긴 부끄럽지만) 로마 여행을 시작하기 전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목적지는 항상 도보로 이동이 가능 한 곳으로 정할 것."
일단 저는 여행지에서는 걸어다는 것을 선호합니다. 직접 제 두 발을 이용해 그곳의 대지를 내 존재의 무게를 담아 누르며 어떤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음, 내가 지금 이곳(이번 경우엔 로마 겠죠?)에 정말로 와 있구나.'라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은 택시나 버스를 타고 말 그대로 앉아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분들은 차 안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그 도시를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제 경우엔(지극히 개인적으로) 조금은 지치고 조금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보이지 않은 선을 한 뼘 한 뼘 제 발로 지우며 걷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조금은 낭만도 있고요. 게다가 그렇게 걷다 보면 묘하게 그 도시와 저 사이에 꽤 단단한 연결 고리가 생깁니다. 그렇게 한 번 형성된 연결 고리는 제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남아있는 연결 고리를 찬찬히 살펴보며 글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저에게 걷는다는 건 중요한 시료를 채취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때론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요.
구글맵으로 확인해서 지금 제가 있는 곳과 목적지 까지. 혹은 그곳에서 그다음 목적지까지. 그 거리가 대략 3km 내외라면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맵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뭐, 일단 걸어보지. 택시 탈 돈도 없고 버스 노선도 모르잖아?'라고 생각합니다. 뭐, 일단은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로마 여행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천천히 걷는 편이니 느긋하게 따라오시길.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