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담요를 좋아합니다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 입니다만, 이라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이야기는 이야기니까요.
삶이 어떤 모양이건 이야기는 계속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적이 있어서...어쩌고 저쩌고 구시렁구시렁.
요즘은 워낙 해외여행을 많이들 가시니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아직 기회가 없으셨던 분들은 참고로 들어주세요),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각 좌석마다 몇 가지 물품들이 놓여있습니다. 담요와 배게 그리고 헤드셋 정도. 무언가 기내 면세품에 열을 올리는 항공사는 종종 기내품 판매 책자를 자리에 떡 하니 올려두기도 합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좁은 통로를 일렬로 통과하느라 느려진 탑승 속도는 좌석에 놓여있는 이 물건들 덕분에 더욱더 느려지게 됩니다. 일단 물건들을 치우고 앉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앉고 나서 조금 한적해지면 다시 일어나 치우지 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헤드셋은 바로 좌석의 앞주머니에 넣고 베개와 담요는 무릎 위에 올려두고 앉는 편입니다. 스탠더드라고 할 순 없지만 일반적이니 참고해주세요.
다른 물건은(이라고 해봤자 헤드셋과 베개이지만) 사용 용도가 비교적 명확합니다. 헤드셋은 비행 중 제공되는 영화나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면 되고 베개는 잠을 잘 때 사용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담요는? 바로 이 담요가 문제입니다. 사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비행기의 실내 온도는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당연하죠. 여름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엔 히터를 틀 때니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담요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끔씩 지나치게 에어켄을 강하게 틀어주는 비행기도 있지만 그럭저럭 담요 없이 버틸만합니다. 그리고 일단 담요를 덮고 있으면 화장실을 갈 때라던지, 화장실을 가려는 창가 쪽 승객에게 자리를 비켜줄 때 상당히 번거롭습니다. 거기에 사용하고 있던 헤드셋의 줄이라도 엉킨다면 조금은 난감해지죠.
이 담요라는 게 항공사마다 색이 다릅니다. 그리고 담요에는 각 항공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 번 비행기를 타다 보면 일종의 항공사 담요를 구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대한항공의 담요는 단풍색의 체크무늬, 아시아나항공의 담요는 보들보들한 촉감의 회색. 이렇게 말이죠. 제 경험상 크기는 거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항공사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최소한 담요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만을 만족시키는 담요를 제작했을 테니까요. 자본주의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름지기 승객 중엔 덩치가 큰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죠.
본격적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20대 초반 한창 배낭여행에 심취해서(30대인 지금도 그렇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여행을 이어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인도를 향하는 비행기였고, 방콕에서 한 번 경유를 하는 타이항공이었습니다. 참고로 타이항공의 담요는 보라색입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담요의 중간 정도의 보들보들한 재질. 비행기의 좌석에 앉자마자 그 영롱하고 보드라운 담요에 빠져, 는 아니고 담요의 비닐을 뜯지도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졸음이 밀려와 잠이 들었습니다. 기내식이 나올 때쯤 일어나 밥을 먹고(간장 양념이 된 닭고기 요리였습니다. 이런 걸 왜 기억하는지...), 맥주를 마시고는 다시 잠을 청하고 나니 어느새 인도의 델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비행기에서 내리려고 하는 그때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담요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번뜩 이 담요를 챙겨가면 뭔가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담요를 작은 배낭에 챙겨 넣었습니다.
맞습니다. 전 당시 항공사 담요는 승객에게 배부된 일종의 개인용품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담요를 두고 가는 것도 가져가는 것도 승객인 나의 자유라고. 무지했으니 망설임이 없었고, 망설임 없이 행해진 덕분에 자연스럽게 담요 절도를 능숙하게 해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말이죠.
후에 항공사 담요는 항공사의 물품으로 무단으로 가져갔을 경우엔 절도죄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절도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라 이미 지나가긴 했지만 여전히 이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후끈거립니다.
다시 한번 타이 항공사의 관계자 분들에게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꾸벅.
어쨌든 전 인도를 여행하면서 이 담요를 꽤나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어깨에 두르는 숄처럼 두르고는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고 숙소의 빈약한 담요를 대신해 덮고 자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차에서도 잘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인도의 거리 위에서, 숙소의 도미토리 방 안에서 제 것(은 아니지만)과 같은 영롱한 보랏빛의 타이항공 담요를 두르고 있는 여행자를 여럿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묘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었죠. 역시 무지는 뻔뻔함을 만들어냅니다.
후로는 비행 중 담요를 잘 사용하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담요를 챙기는 절도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가끔 담요를 챙겨가는 승객들을 저지하기도... 는 아니고 그런 승객들을 보면 언젠가의 제가 떠올라 얼굴이 다시 한번 후끈거립니다. 역시나 사람은 죄를 짓고 살긴 힘든 것 같습니다. 물론 잘 사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구시렁구시렁.
이번 글을 참회의 글입니다.
여러분 항공사의 담요는 절대 챙겨가시면 안 됩니다.
7년을 들키지 않을 자신과 능청스러움을 가진 승객이 아니라면요(아니, 그래도 하지 마세요).
*요즘은 담요가 좌석에 놓여있지 않고 요청을 하면 주는 항공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전히 담요를 챙겨가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언젠가의 저처럼 말이죠. 다시 얼굴이 후끈).
*대한항공이 담요 디자인을 바꿨다고 하네요. 아쉽네요 전 단풍색깔의 체크무늬 담요가 좋았는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담요는 아시아나 항공의 회색 담요입니다. 정말 보드라워요. 아시아나 항공사 관계자분들 참고해주세요. 그냥 그렇다고요.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