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세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건넨다.
그 질문들은 존재하는 세상 스스로를 명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안의 작은 것들(그러니까 비록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라 할지라도)에 대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책임감이다. 모든 존재는 세상이 자신에게 건넨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찾아가는 것일 테니까.
가령 우리의 세계관이나 철학, 좁게는 취향이나 취미 따위는 결국 세상이 우리에게 건넨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세상에 쏟아냄으로써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된다, 라는 메커니즘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난 무얼 좋아하는가.
난 누구를 사랑하는가.
종국에 난 누구인가.
뭐 이런 질문들.
대답을 멈추게 되면 그 존재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다소 말장난 같지만 결국 그렇게 된다.
세상이 자신에게 건넨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존재는 멈춰버리게 되고,
멈춰버린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답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살기 싫다면 대답을 멈추면 된다.
나는 어느 순간 대답을 멈추었다.
그 순간이 언제였느냐 세상이 묻는다면 나는 그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나다.
나는 뭔가 확정 짓는 말 따위를 나는 하지 못한다. 그런 말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가령, “3시쯤에 합정역 5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라는 말은 나에겐 쥐약이다. 3시 조금 전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10분 정도는 늦어도 상관없는 건지. 또 5번 출구가 아니라 7번 출구면 어떤데? 어차피 만나게 될 건데, 라는 것이 나의 인생관이다. 그래서 나는 시계를 보는 일도,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일도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누군가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이해해기 시작하면 그 인생은 여유로워진다고 믿는다.
그건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큰 불확실성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불확실성은 바로 자신이므로.
그 시기는(그러니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십 대의 끝 무렵일 수도 있고, 첫사랑이 끝나버린 뒤 일수도 있다. 또는 처녀성을 잃거나 총각딱지를 뗀 뒤일 수도.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 일반론일 뿐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만큼 절대적이진 않다.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해본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삶은 여전히 계속 불안하다. 불안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에 나는 나를 둘러싼 불안을 포기하고 체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타인과 교류의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무렵부터(아마 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난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건 무엇하나 확실치 않은 내 인생 때문이었다. 불확실성으로 뒤덮인 인생에서 침묵은 뛰어난 자기방어의 수단이 되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선택적 침묵.
물론 침묵 또한 확실한 대답이 된다는 것을 나이가 좀 더 들어 알게 되었지만 당시엔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난 어렸었고, 어리다는 것은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것들은 용인되게 해주었으니까.
나의 침묵 때문에 난 늘 조용한 아이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면 조금은 이상한 아이.
마지막은 결국 무서운 아이가 되었다.
종종 뱉어지는 나의 한마디는 내 것 이상의 의미로 상대에게 전달되었고, 사람들은 조금씩 나와 마주하는 것을 꺼려했다.
많은 이들이 나를 비켜갔지만 나는 그들을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결국 나의 침묵이 원인이었고 그건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그 수많은 동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꼭 닫았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며, 그럭저럭 살아갔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버텨냈다.
지금부터 내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침묵했기에 끝없이 내 속으로만 쌓여갔던 내 속의 모습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글을 써나 가다 보면 내 인생에도 확실성 이란 것이 생기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나도 그럴듯한 대답을 세상에게 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런 게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세상에 그 누가 온전히 확실한 삶을 살겠느냐, 라는 것이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괜찮다는 생각.
그런 것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