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가람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니, 정정. 나의 유일했던 친구.
가람이는 나에게 있어 단 한 명의 친구였다. 그러니까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말하긴 약간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일한"이라는 것은 "가장"이란 말과 바꾸더라도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니까 가람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말이다.
사실 가람이는 나와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은 그런 타입의 아이 었다.
공부도 무척 잘 했다. 거기에 뛰어난 운동 능력 까지. 또 사교성도 있어서 주위엔 항상 여러 친구들로 가득했다. 선생님들도 가람이를 무척이나 신뢰했다. 무엇보다도 여자 아이들이 항상 가람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물론 가람이는 그런 것에 으쓱하거나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그게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 사고의 영역 안에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나와는 정 반대편에 놓여있는 사람. 그리고 그 간극이 꽤나 큰.
북극과 남극, 물과 기름 정도로.
그런 가람이가 항상 조용하고 일상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 같은 아이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는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 간부터 우린 서로가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뭔가를 특별히 공유하진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서로 같은 공간에 존재하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했었다는 말은 친구라는 관계를 설명하기엔 부족하기도 하고 충분하기도 하다. 다만 우린 서로의 침묵이 어색한 관계가 아니었고, 나에게 있어서 그런 관계는 충분히 친구라는 관계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해서 멀리서 보면 꽤나 어색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가람이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아마 가람이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라는 단서를 붙일 수 밖엔 없지만 적어도 나는 가람이도 그랬을 것이란 확신이 있다. 완벽하다고 해서 자연스러운 건 아니니까.
*
내 직업은 출판사 에디터다.
여전히 침묵했고, 여전히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지 못한 나에겐 이 직업은 참 적당하다.
난 남들이 써 놓은 원고를 다듬는 일을 한다. 어미를 부드럽게 고치기도하고, 어색한 단어를 적절한 단어로 치환하기도 하고, 맥락에 벗어난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기도 한다. 두서없는 글을(하지만 멀리서 보면 꽤 괜찮은) 적당히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이다.
즐겁게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잘 해 냈으므로 이 바닥에선 나를 불러주는 출판사가 꽤 많았다. 난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꾸준한 편이고,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하니까.
세상은 점점 성실함보다는 처세가 인정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성실함이 없으면 세상은 굴러가지 않는다. 나는 세계라는 시계 안에서 성실하고 묵묵한 하나의 나사이다.
오후 3시는 불안한 시간이다.
아침에 다짐한 파이팅이 흔들릴 쯤의 시간이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계획하기엔 약간은 지친 시간이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흐린 날의 오후 3시는 정말이지 최악이다. 차라리 한바탕 시원하게 비가 쏟아진다면 괜찮을 것을. 대기는 수분을 머금고만 있을 뿐 도무지 그것을 뱉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는 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돼버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그건 나에겐 견디기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선택이 보류된 상태. 그래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 그런 상태는 적당히 세상에서 떨어져 주위를 겉도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번 나에게 잔인하게 직시시켜준다. 너는 이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고.
책상을 보니 오늘 손 봐야 할 원고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집중해서 일을 한다면 4시간쯤 걸릴 것이다. 그럼 7시쯤 오늘 분량을 끝내고 퇴근. 집에 들어가는 길에 바에 들려서 맥주를 한 잔 해야지 생각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비를 피해 빗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기에 집 앞 바는 적당했고, 주인이 선곡하는 음악들도 들어줄만했다. 아니 상당히 괜찮은 쪽이었다.
40분 일을 한 뒤 20분 휴식. 내 철칙이다.
글을 다듬는 일이라는 건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잘 되는 일이 아니다. 글을 이어가는 적절한 단어가 떠올라야 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잘 배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겐 40분을 일한 뒤 20분의 휴식이 꼭 필요하다. 그 20분의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의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 몸을 담근다. 그 안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녀석들을 찾아내 주머니에 넣는다. 마치 보물 찾기와 비슷하다.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단어들은 겉치레만 번지르한 옷차림에 지나지 않는다. 알맹이는 없는. 휴식을 끝내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단어들을 문장들 속에 집어넣으면서 다시 작업은 시작된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마감날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출판사 누구도 나의 약간은 많은 휴식에 불만을 갖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하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까만 세상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 환한 세상에 놓인듯한 기분이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의미들이 넘쳐나고 내 주위를 득실대지만 정작 건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오전부터 지금까지 20분의 휴식시간을 철저히 지켰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상한 날씨 때문인 것이다. 의미 있는 의미들이 모두 오후 3시가 되니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책상을 정리했다. 편집장님에겐 적당히 둘러대고는 일찍 퇴근했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이지 너무 힘이 빠진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집 앞 골목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바는 언제나 한산하다.
함께 온 손님보다 혼자 온 손님이 많기 때문에 난 이 바를 좋아한다. 혼자 가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물론 나는 항상 혼자 지내왔기 때문에 혼자인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놓인 사람을 따듯하게 바라봐주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로 여기고 곁눈질한다. 원 안에 넣어주려 하지 않고 밀어낸다. 거기다 요즘은 그런 것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다. 배제라는 무관심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그런 세상에서 잠시 비켜있는 곳이다. 대부분이 혼자 온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은 혼자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공동체라 하고 하는 커다란 편협함에 가두려 하고, 연대가 필요할 때는 정작 손을 내밀지 않는다. 등을 보이며 돌아선다. 그것들의 구분조차 이제는 모호해졌다. 나는 그런 것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종종 서글퍼진다.
나는 주인에게 맥주 한 잔을 부탁하고는 바의 기다란 테이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기다란 테이블의 건너편엔 그녀가 앉아있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종종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었다.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한 그녀는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와서는 “아저씨 지금 아저씨가 앉아있는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라고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니까 그쪽이 좀 비켜줬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었다. 눈은 흐리멍덩했고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만큼 두 다리는 위태로웠었다. 나는 별 말하지 않고 옆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술주정을 한참이나 들어줬었다. 덕분에 난 그녀가 나를 아는 것에 비해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나에게 강 같은 곳이 그녀에게는 아마 이 바의 구석진 자리였나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나에게 뱉어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홍대의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부른다. 가끔 거리에서 버스킹을 했기 때문에 몇 번 거리를 오가다 나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도 있었다. 노래를 꽤나 잘 부른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며칠이고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에 훌륭한 자질 같은 걸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잘 부른 노래도 좋지만 계속해서 생각나는 노래는 더 좋으니 말이다. 이름이 소리라고 했다. 원래 본명인 건지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니 그럴싸하게 소리라고 이름을 붙인 건지는 모르겠다.
사실 작은 동네의 좁은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이 바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다. 주인은 꽤나 즐겁게 바를 운영하고 있었고(장사가 그리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흘러나오는 노래 또한 나쁘지 않았으므로 난 이 바에 자주 온다. 그리고 아마 소리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이 바에 자주 오는 것 같다.
속을 얼려버릴 정도로 시원한 맥주와 유난히 더웠던 봄, 그리고 팝송이 주로 흘러나오는 바의 음악과 소리와 내가 그곳에 존재했다.
나는 소리의 건너편에서 소리에게 눈인사를 했다. 소리는 역시나 이미 술이 꽤나 취해있었다. 나를 보자 소리는 손을 흔들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했다. 나는 자리를 옮겨 소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고 그녀의 날숨에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었다.
“애초에 사람이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소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재떨이에 담배를 탁탁 털면서 말했다. 소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갑자기 나에게 툭 던진다. 난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휘말리고 만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잖아요. 그런데 스스로에게 조차 불확실한 감정을 누군가에게 약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요. 거짓말 인 거죠. 세상에서 가장 불 확실한 건 자신이고, 그것보다 더 불 확실한 건 자신의 감정이니까.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 안 그래요?”
소리는 담배연기를 하늘로 뿌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하고는 날 바라봤다. 내 생각을 묻는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정확하게 나를 향했다. 결국 난 무엇이 됐든 내 생각을 말해야 한다. 그녀는 아마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계속해서 나만 바라보기 있을 테니까. 소리는 술에 취하면 엉뚱하고 집요해진다.
“음…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지키려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나보단 소리가 한참 어렸기 때문에(아마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난 소리에게 말을 편하게 했다. 차가운 맥주잔엔 거품이 가득했고 맥주잔 주변에 세밀한 물방을 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하단 뜻이다. 나는 맥주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소리에게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종의 약속인 거지. 거기에 거창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고.”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겨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나 시원했다. 나는 맥주를 마신 후 조심스럽게 소리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으면 했다.
“아저씨는 약속이라는 걸 상당히 맹신하시네요.”
소리는 내 대답이 상당히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가볍게 웃으며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응. 그러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어. 그게 나에게 스트레스만 아니라면.”
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허공에 내뱉는다.
“아저씨랑 이야기하면 항상 결론이 안 나요. 답답해.”
“너무 답답해하진 마. 누구나 모두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 뭐, 좋아요.”
소리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가녀린 손가락에 걸려있는 가녀린 담배 끝이 붉은빛을 껌뻑거린다. 마치 심장이 박동하는 것 같았다. 적이도 이 순간에는 나보다 담배가 그녀에게 더 위안이 된 듯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소리는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 바에 오는 적이 없었다. 매번 내가 올 때쯤엔 혼자 구석진 자리에 앉아 적당히 취해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내가 평상시보다 일찍 퇴근을 해서 꽤 이른 시간인데도 말이다. 도대체 그녀는 몇 시부터 이 자리에 앉아있었던 걸까? 소리가 마셨던 맥주잔들은 이미 치워져 있었지만 재떨이에 쌓인 수북한 담배꽁초를 보니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을 것이다. 담배연기와 그만큼의 생각들을 허공에 뱉어내면서.
바에서 소리와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이면 우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약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힘들지 않은. 그리고 맥주를 지독히도 좋아한다는 것. 거기다 담배도.
“… 있잖아요. 그 사람이 연락이 없어요.” 한참을 말이 없던 소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하기엔 그녀의 말은 너무 빈약했다. 담배 한대를 꺼내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연락이 없다고요. 오늘 하루 종일. 내 핸드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어요."
소리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지. 그리고 네가 먼저 연락을 하면 되잖아.” 담배를 내려놓고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면서 내가 말했다.
언젠가 소리가 그 남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어렴풋하게나마 소리의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니. 난 절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아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매번 먼저 연락을 하는 건 그 남자예요. 목요일 저녁쯤에 전화가 와요. 그리고 우린 금요일에 만나는 거죠. 내 집에서 그가 만든 저녁을 먹고 와인이나 양주 따위를 마셔요.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서로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죠. 그의 와이프 이야기라던지 요즘 뜨고 있는 부동산이 어디라든지 그런 소모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그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그는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요. 매번 그런 식이죠. 그런데 그가 2주째 연락이 없어요.”
소리는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그리곤 맥주를 단숨이 들이켜고는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나는 잠시 왜 술을 마실 때는 담배 생각이 많이 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술이 담배 생각을 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담배가 술 생각을 나게 하는 것인지.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어쨌든 나는 술과 담배 둘 모두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것이니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계속 즐기면 되는 거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삶이라면 좋아하는 것의 원인인 분석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오늘 소리는 평상시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다소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의 대부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잠식하고 있었다. 불안한 열정. 불안과 열정이 만나면 슬프다. 이것 역시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그래서 오늘 그녀는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한 번쯤 먼저 연락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내가 연락을 하면 아마 그는 받지 않을 거예요.”
“...” 나는 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리도 말이 없었고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소리는 한참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몇 번이고 만지작 거리더니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대해서 몇 마디 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했어?” 침묵을 깨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전화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바가 문이 열기만을 기다렸다가 맥주를 마셨죠. 여기에 있으면 그에게 전화는 오지 않더라도 아저씨는 올 테니까.”
소리는 나를 바라봤다. 소리의 눈은 오늘 날씨만큼 습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소리의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약간 억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건 고작 이 정도였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와의 약속은 절대 잊지 않아,라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으니까. 어쩌면 변심했을지 모르는 남자의 마음을 이야기해주는 건 아직은 어린 소리에겐 잔인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오늘 뭐했어요?"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마치 내가 오후 3시가 된 듯한 기분이었거든.”
“오후 3시요?” 소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오후 3시가 어떤 건데요?”
“아무것도 아닌 시간.”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우리의 대화는 다시 단절되었다.
바에서는 재즈풍의 연주곡이 흘러나왔고 밖에서는 여리게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맥주잔을 바라보며 가람이를 생각했다. 나의 유일했던 사람. 가람이는 이미 죽고 없으니 지금 나는 결국 외톨이다. 그러니 난 소리처럼 누군가의 전화를 간절히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무엇도 간절하지 않으니 기대가 없고, 기대가 없으니 좌절이 없으므로 나는 외롭지도 않다. 아니 외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적어도 나에겐 가람이 한 명이면 충분했다고.
“그럼 오후 3시는 외로운 시간이네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 그래서 외로운 시간. 맞아요?” 소리가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가만히 가람이를 생각했고, 외톨이는 외로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외톨이는 외로운 게 아니라 다만 조금 슬플 뿐이라고. 외로운 것보다는 슬픈 것이 견디기 쉬운 것이라고.
봄부터 여름의 시작까지 내가 꾸준히 해낸 거라곤 맥주를 마신 것이었다. 바에서도 마시고 집에서도 마셨다. 월급의 절반 정도를 술값으로 지불했으니 그 양이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가끔 이 많은 양의 맥주가 어떻게 몸안에 다 들어가지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는 내가 먹은 맥주의 양만큼 소변으로 빼내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위와 간 사이쯤에 다른 이에게 없는 특별한 기관이 나에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특별한 기관이 내가 마신 맥주를 저장하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매일 맥주를 마셔댔다.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날들이었으니까.
보통 때 소리와 난 술을 마실 때 서로에 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난 종종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가수가 누군지를 알아맞히는 걸 좋아했다. 주로 밴드의 음악들이 흘러나왔고 난 열개 중 여덟 개쯤은 알아맞혔다. 이런 날 소리는 항상 놀랍다는 듯이 바라봤다. 소리는 주로 사회나 정치 쪽 이야기를 많이 했다. 모두 다 쓰레기란다. 난 그래도 사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럴 때마다 소리는 그런 것 따위 개나 줘버려,라고 했다. 그녀는 뭔가 사회에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의 대화 패턴은 항상 이런 식이다.
정답은 없었고 맥주와 담배만 있다.
난 바에서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불안한 소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무더웠던 그해 봄, 한 달 간의 나의 기묘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건 선로를 벗어난 기차와 같았고 방향을 잃어버린 채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떠도는 인공위성의 잔해와 같은 것이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게 아니면 그저 몇 번을 고쳐 써야 하는 편지처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해 봄 나에게는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이라는 건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 테고, 그건 끝이 있다는 거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은 시작 따위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볍건 무겁건 말이다.
시작이 시작되었으니 나에게도 끝이 있겠지.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