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나는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소리의 집에서 나왔다.
소리는 자기 집에는 이제 도저히 점심을 만들어 먹을 만한 재료는 없다고 두 번쯤 냉장고를 뒤지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장을 보러 가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소리는 근처 마트로 향했고, 나는 소리와 마트 앞 까지 함께 걸은 뒤 소리를 보내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소리와 헤어지고 희형이 있는(물론 외출을 해서 없을 수도 있지만)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난 왜 소리 집에 잠을 자게 된 것일까? 내가 소리와 깊은 관계가 된 걸까?
물론 전혀 아니다,라고 말 하기는 어렵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깊은 관계가 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나에게 과연 그런 의사가 있느냐(그러니까 소리와 깊은 관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물론 사람 사이에 생기는 서로를 향한 감정은 일정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일 테고, 그런 면에서 난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에 관해선 이렇다 저렇다 장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그건 보류하도록 하자. 하지만 확실한 건 난 그녀의 집에 잠을 잤고(말 그대로 잠만 잤다. 내 몸에 소리의 이빨 자국이 없는 걸 보니 그건 확실하다), 아침에 그녀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함께 먹었으며, 그 기분이 상당히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뒤로 미루고 미루어왔던 "어떤 감정”을 다시 꺼내려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외면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어떤 세상에 내가 발을 딛기 시작한 것일지도. 여전히 그게 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언제부턴가 나는 희형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희형이 내 삶에서 자신의 영역을 점점 확장시켜나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그녀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는 그녀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신경 쓴다는 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신경 쓴다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희형을 만나지 건 까지는(엄밀히 말해서 가람이가 죽은 이후부터) 난 타인을 내 삶 속에 깊이 들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기존의 세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오랫동안 말 그대로 “혼자” 살아왔던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기보단 생각하는 것이 편했고, 타인을 신경 쓰는 것도 타인이 나를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아했던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요즘 들어 자꾸 희형이 신경 쓰인다는 건 어쩌면 앞으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인가 벌이 질 수 있겠다는 징조일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마지막으로. 소리와 희형은 지금의 내 삶에 겹쳐 있지만 둘은 확실히 다른 객체로 분리가 돼있다는 것이다.
둘은 나와 엮여 있지만 서로는 별개이고 그러므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내가 그 둘에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감정을 적당히 나누어 둘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둘을 향한 내 감정의 원천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자꾸만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생각들로 그 해 봄의 시작은 유난히 더웠던 날씨와 함께 나는 약간은 혼란스러웠고 조금은 당황스러웠으며 반면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있었다.
집에 들아가니 아무도 없었다.
‘희형은 어딜 나갔나?’ 나는 거실의 창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창문을 통해 불어 들어온 선선한 공가기 집 안을 한 번 휘감아 지나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집안 곳곳의 냄새들이 섞여 나에게 들어왔다. 안방에 있는 복숭아 향 디퓨져의 냄새와 책장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들의 종이 냄새가 났다. 빨래통에 던져져 있는 지난 빨래의 눅눅한 냄새도 났고 신발장에 있는 구두약의 냄새도 났다. 하지만 바람이 가져다준 집 안의 냄새는 희형의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5년을 넘게 살고 있는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희형의 부재는 불현듯 나에게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제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아침 일찍 외출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애초의 이 집에 희형의 흔적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희형이 집에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처음엔 그게 좋았었다. 희형이 집에 머물고 있지만 희형의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혼자 지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그녀의 부재와 동시에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집에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홀로 먼 외딴섬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건 마치 이 집에 나의 흔적이 없는 것과 같았다. 이곳은 나의 집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
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마셨다. 열린 창문 밖으로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꼬마가 보였다. 자기보다 커다란 개를 끌고 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개에게 꼬마가 끌려가는 듯도 했다. 길 건너편엔 누군가 물을 실컷 준 화분들이 일렬로 늘어서서는 품었던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멀리 선 어렴풋하게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평범한 토요일 오후는 그렇게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희형이 생각날 것 같았다. 그런데 희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이 낯선 집에선 도무지 희형이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난감했다. 희형의 부재는 나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나는 노래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반 위의 LP들을 살펴봤지만 어떤 노래를 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두세 장의 LP판을 손에 올려 두고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의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며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렇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희형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는 1부터 10까지 숫자를 떠올린 뒤 다시 10부터 1까지 하나씩 순서대로 없애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창으로 들어온 가느다란 햇빛만이 내 발을 감쌌다.
간간히 멀리서 작은 음악소리가 들렸는데 도무지 어떤 노래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의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그렇게 햇살이 따듯한 소파 위에서 아득해져 갔다.
나는 그렇게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새벽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고, 또 낯선 곳에서 잠을 잤으니 몸이 피곤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발을 깜 싸고 있던 햇빛이 점점 올라와 내 몸을 감싸니 이불을 덮지 않아도 몸이 따듯해졌고 그만 잠이 든 것이다.
얼마쯤 잠을 잤을까? 누군가 내 얼굴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희형이었다. 희형이 손에 햇살을 담아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희형은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경견 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 온 거야?”
희형이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촉감이 좋았다. 이 촉감 때문에 잠에서 깼지만 다시 이 촉감 때문에 얼마든지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를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건 마치 엄마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자고 있는 나를 쓰다듬어주는 느낌.
“십분 쯤 전에.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 희형은 여전히 내 얼굴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희형의 손가락이 내 귀와 볼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따듯했다.
“어딜 다녀온 거야?” 나는 희형의 손에 내 손을 포개어 잡으며 말했다.
“응. 잠시 어디에 좀 다녀왔어.”
“그렇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물으면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끌 여당겨 내 옆에 앉혔고,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창 밖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햇살을 덮고, 서로 몸을 포개어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더군다나 이렇게 햇빛이 따듯한 날은 소파 위에 가만히 앉아 햇빛을 쬐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 평일에 열심히 일을 했으니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쉬는 것도 좋지.”라고 말하며 희형은 얼굴을 내 가슴에 더 깊이 파묻었다.
“집에 들어왔는데 당신이 없어서 조금 이상했어.”
“내가 생각났어?”
“응.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그럴 땐 어떻게 하는데?”
“별 다른 방법은 없어. 생각하려 애쓰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때부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지. 그게 다야.”
“나를 생각해보려 했는데 내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야?”
“종종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야.”
“사람을 떠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 가령 그 사람의 냄새라던가 아니면 말투라던가 그런 거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만의 습관이랄까?”
“맞아. 그런데 당신은 그런 게 없어. 마치 공기 같아. 색도 냄새도 없는.”
“내가 그런가?”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난 이렇게 당신 옆에 있는 걸.”
“맞아. 이렇게 손에 잡히니 조금은 안심이 되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금 이 느낌을 잘 기억해 둬. 그래서 내가 없어도 날 생각해낼 수 있게 말이야.”
“고마워. 잘 기억해 둘게.”
나는 희형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어제저녁 술을 많이 마셨어. 자주 가는 바에서 자주 술을 같이 마시는 여자애와. 그리고 그 여자애 집에서 자고 아침에 들어온 거야.”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내가 마른 입술을 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야?”
“글쎄… 그냥. 사실 잘 모르겠어. 내가 왜 당신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당신도 잘 알지 못하는 걸 굳이 나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있잖아. 그거면 된 거야.”
“그래. 고마워.”
우리는 서로의 몸을 포갰고 그 위로 햇살이 우리를 덮었다.
그녀는 그렇게 항상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건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종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이므로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신기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