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가람이가 그렇게 죽어버린 뒤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그건 별 것 없는 시시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가람이의 죽음을 전 후로 해서 내 삶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선 단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기기기의 이야기.
가람이의 죽음 전과 비슷한 삶. 별다를 것 없는 시시한 시간들. 결국 다시 세상에 침묵하는 삶.
그것이 가람이가 죽은 후의 내 삶이었다.
그래도 난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애초에 대화 상대는 가람이 뿐이었으므로 주변의 사람들에겐 난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 아이 었다. 원래 말을 하지 않았던 아이가 계속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 조차도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하셨다.
하지만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내 안에 많은 것들은 요동쳤었다. 고작 눈에 보일 듯 말듯한 작은 미끼 하나를 던져놓고 보이지 않는 본질을 모두 빼앗아가는 게 세상이었으니까. 간단히 말해서 내적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무언가 크게 변해버렸다.
그런 변화 앞에서 한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다.
그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계속해서 질문도 해보았지만 결국 나는 답은 찾지 못했다. 적절한 대답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세상은 나를 타일렀다.
가람이의 죽음은 나에게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 보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가람이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납득해 버린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세상이 어두워지면 가람이의 존재는 스멀스멀 내 깊은 곳에서 다시 살아나 나의 삶에 자꾸만 관여했다. 난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어야 할지가 혼란스러웠다.
가람이는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죽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가람이를 야속하게 생각한다거나 가람이에게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람이는 나에게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나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충분히 그것을 이해할 것이라는 확신. 그러니까 가람이는 나를 충분히 믿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람이는 세상에서 나 한명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충분히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가람이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믿어주었던 가람이에게 내가 가람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나를 향한 가람이의 믿음에 대한.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이면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래야만 했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가람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러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 제대로 살지 못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가람이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잘 살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나만이 움켜쥐고 있던 나의 세계 안에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나만의 문제.
애초에 나는 가람이를 내 삶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가람이가 그렇게 죽어버린 후로 난 며칠 동안은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했다. 가람이를 내 삶에 들여놓는 게 아니었어,라고. 그러니까 가람이를 처음 만난 날 가람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여느 때의 나처럼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람이를 지나쳤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그랬다면.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정말이지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그것은 어찌 되었건 그 시간을 충실히 보냈던 나에게도, 또 그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가람이에게도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가람이와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나의 평가는 가람이가 없는 지금 결국 나 혼자 결론 내려야 했다. 그 시간에 대한 평가는 태생부터가 그 평가에 관여하지 못하는 가람이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난 계속해서 공정해지려 노력했다.
가람이가 내 삶에 등장하기 전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를 나는 가람이를 통해 받아들였고, 그 시간 동안을 충분히 행복했었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람이가 죽어버린 후로 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공정하게 평가한 우리의 시간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새로운 세계,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상실.
마치 과학의 변증법처럼 그렇게 짧은 세 단계를 거쳐 가람이의 삶은 내 삶 속에서 종료된 것이다.
전구의 퓨즈가 나가버린 것처럼 갑작스레.
그리곤 영원한 암전.
가람이의 죽음은 내 인생의 두 번째 상실이었다.
내 첫 번째 상실은 엄마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엄마는 날 낳다가 죽었다. 나의 탄생이 엄마의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결과론적인 부분에서 말하자면 이것만큼 큰 슬픔도 없긴 하겠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내가 나왔을 때 난 그저 크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누군가가 나에게 네가 태어나면 엄마가 죽어야만 한단다. 어떻게 하고 싶니?,라고 물어봤다면 난 생각할 것도 없이 엄마를 살렸을 것이다. 난 엄마의 목숨 값으로 얻은 삶을 그리 가치 있게 살아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당시엔 나에겐 선택권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내가 처음 인식해야 했던 것이 바로 엄마의 죽음이었다. 그건 누가 말해주지 않다 하더라도 날 바라보던 아버지의 싸늘한 눈빛에서 충분히,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비참하게 나에게 전해졌었다. 하지만 난 그것이 슬프거나 그로 인한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엄마의 죽음에 내가 의식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나의 첫 번째 상실은 그냥 자연스레 흘러가버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내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엄마의 죽음은 나에게 괜찮다고 한다면 나름 견딜 만한 괜찮은 상실이었다.
그런데 가람이의 죽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나에게 처음으로 온전히 의지가 담긴 채 떠넘겨 저버린 상실이었다.
가람이를 만나기 전에 내 삶은 항상 혼자였다. 혼자였던 삶이 나에겐 결핍이라거나 불편함은 아니었다.
난 그 시작이 내 의지였던 타의였건 어쨌든 혼자라는 삶의 방식에 적응을 했었고, 그럭저럭 잘 살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에겐 가람이를 만난 뒤 나의 삶이 낯선 것이었다. 타인과 함께하고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가람이를 만난 뒤 모든 것이 나에겐 처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함께했던 누군가의 상실도 나에겐 처음이었다.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난 서툴렀고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럼에도 난 혼자서 견뎌야만 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결국 난 다시 처음처럼 혼자가 되었다.
사실 난 가람이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했었다.
가람이는 나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내 삶에서 내가 타인과 함께 했던 시간의 대부분은 가람이와 함께였다. 난 아버지와도 관계라는 것을 맺지 않았으므로. 가람이는 나에겐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첫 몽정을 가람이에게 가장 먼저 알려 줬었고, 나에게 처음 담배를 가르쳐준 것도 가람이었다. “처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람이와 “함께” 했었다.
가람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과 관계 맺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적당히 분배해서 쏟아부으며 살아간다면, 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가람이에게만 쏟아부었다. 나 자신보다 가람이를 더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가람이가 죽기 얼마 전부터 난 가람이가 곧 자신의 삶을 끝낼 거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가람이의 말투나 행동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지만 난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얼마 안 있어 가람이는 자신의 삶을 끝낼 거라고. 그런데 가람이를 만날 때마다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음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가람이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가람이가 그런 결정을 했다면 그건 내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 스스로도 점점 다가오는 가람이의 죽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버린 것이다.
가람이가 스스로 삶을 끝내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가람이가 죽기 바로 전 날까지 우린 함께 있었다.
우리는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봤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재밌는 영화였다. 정말지 오랜만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던 그런 영화.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영화를 보고 강 변을 산책하고, 공원의 구석진 곳에 몰래 숨어 맥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여느 때처럼 그렇게 평범한 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가람이는 자살을 했다. 그날 가람이와 헤어질 때 가람이가 내 손을 잡으면서 “잘 지내.”라고 말했었다. 분명한 건 가람이가 죽으면 난 잘 지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람이도 그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람이가 나에게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이 “잘 지내.”였다.
어쨌든 나는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 복잡하고 뒤섞여 있던 대부분의 것들이 이제야 조금은 내 안에서 정리가 된 것이다. 아니, 정리가 되었다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체념해버렸다는 표현이 좀 더 맞을지 모르겠다. 가람이가 죽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고, 뭔가를 할 에너지도 없었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든 학교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결국 다시 세상에 침묵을 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가람이를 만나기 전처럼.
한동안은 선생님의 지나친 배려로 정신과 병원엘 다녔었다. 의사는 단순한 쇼크로 인한 우울증이라면서 도저히 하루에 다 먹을 수도 없을 만큼의 알약을 나에게 주었다. 정말이지 저걸 다 먹는다면 약으로만 위가 가득 차 버릴 것 같은 양이었다. 하지만 난 우울증이 아니었다. 나는 약을 전부 변기통에 던지고는 물을 내려버렸다. 한 달 쯤이 지난 뒤 의사는 나에게 많이 괜찮아졌다면 이제는 약을 그만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단 한 알도 먹지 않았는데 말이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거짓과 위선들로 넘쳐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많은 거짓들을 깡그리 한 데 모아서는 변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건 알약이 아니었다. 나는 가람이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나 연습 같은 것이 필요했다. 물론 난 가람이를 만나기 전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런대로 잘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전처럼 되지가 않았다. 내 안엔 뭔가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그때부터의 삶은 가람이를 만나기 전과는 삶의 맥락이 달라진 것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처럼, 있다가 없는 건 애초에 없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람이가 부재한 세상은 나에겐 생경한 곳이었고, 난 계속해서 넘어지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날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가람이는 죽고 없었고, 애초에 내 옆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하루 종일 방에만 있다가 가끔씩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그러다 지루해지면 담배를 피우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지루해지면 책을 보며 지냈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저 녀석도 가람이처럼 스스로 삶을 끝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간섭하지 않으셨다.
나는 이제부터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었고, 가람이가 정말 죽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한동안을 지내다가 집 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는 게 나에겐 참 적당했다. 말을 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손님이 물건은 카운터에 올려놓으면 나는 물건의 바코드를 찾아 리더기로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은 뒤 거스름돈을 건네주면 된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야간조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를 해주면 끝. 돈을 쓸 일이 많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도 충분히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조금은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약간의 노력은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난 삶을 이어나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가고,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담배를 피우고,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쉬기도 하면서. 때론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고, 때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너무 가라앉지도 않고, 너무 흥분되지도 않게. 삶의 에너지를 적당히 분배해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생활이었다.
이게 가람이가 죽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내 생활이었다.
대학교는 문예창작과를 갔다.
지금이야 나름 전공을 살려서 그럭저럭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문예창작과를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어.
문예 창작과 이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창작물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결국 새로운 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모든 걸 만들어내는 것 마냥 떠들어대는 시대였으니까. 이미 인정받은 결과물을 약간만 변형시켜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는 세상. 그것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고 눈 감아버린 세상. 그리고 그런 비겁한 편법을 누구나가 인정해 줬다. 나도 잠시 그들에게 편승해서 적당히 살아내면 되겠다 싶었었다. 비겁한 도피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대학에 올라가서는 잠시 동안은 여자를 닥치는 대로 만나보기도 했다. 사람과의 기억을 쌓아가면 가람이의 기억이 혹시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금요일 저녁에 옷을 말끔히 차려입고 술집이나 클럽을 전전했다. 세상은 취해있었고 취한 사람들은 무척이나 외로워했다.
나는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외로워 보이는 여자를 찾았다. 그들에게 다가가 적당히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면 그녀들은 나에게 그 날 저녁을 허락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쉬웠고, 쉬웠으므로 시시하기만 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닥치는 대로 여자를 만나고 그녀들과 잠을 자도 가람이의 기억이 지워지진 않았다.
결국 난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짓도 그만두었다.
부질없이 이어진 가벼운 만남은 돈과 시간과 정력과 감정의 낭비였으니까.
대부분의 시간은 수업도 들어가지 않은 채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을 읽었다. 가끔은 시청각실에 가서 옛날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리고 졸업을 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무척 편하다.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이 누군가의 글에 몇 가지 수정만 해주면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 그것도 혼자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말이다.
난 철저하게 룰 안에 갇힌 사람이었다. 그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룰이다. 룰을 벗어나는 삶 따위는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살 생각도 없다. 기상 시간도 일정하고, 일 하는 시간도 일정하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규칙적인 운동은 하지 않지만 걷는 걸 좋아해서 가끔 한강을 걷곤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한강과 매우 가깝다.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5년 넘게 살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게 내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가람이를 잊고 지낸 건 아니었다. 애초에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힐만한 기억들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꽤 많이 생각했다. 가람이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함께 걸었던 길들. 나를 바라보던 가람이의 눈빛들 까지. 그런데 그렇게 자꾸 가람이를 생각할 때마다 내 삶의 룰이 깨졌고 난 엉망이 되곤 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었고, 그러면 가끔 정말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건 정말 단순히 말해서 내 앞에 계속해서 흘러 내려가 버리는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별 다른 요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아직 스스로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었고. 내가 무슨 결론을 내리던, 그 결론이 나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던, 결국 가람이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내가 가람이의 죽음이나 그 이후의 내 삶에 일종의 어떤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을 한다면 오히려 압축되어 내 눈 앞에 놓여 버린 그동안의 시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수 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결론이 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오늘도 내 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던져진 상실이 내 삶의 방향을 약간 틀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본질을 바꾸진 못한다. 변하지 않는 본질은 난 룰 안에 갇힌 사람이라는 것이고, 룰 안에선 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것.
오늘도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에 앉아(사실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일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8시간 일을 하고 퇴근. 점심은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그리고 자주 가는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마셨어. 닭 가슴살이 들어간 샐러드와 함께. 이것이 어제와도 그리고 내일과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나의 생활의 모습이다. 주저리 늘어놓고 보니 시시하기도 하고 다시 주워 담고 싶을 만큼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변함없이 꾸준하게 계속해서 가람이를 생각했고 또 생각했다.
결국 가람이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나는 체념을 했다.
그리고 어느 해 봄 희형과 소리가 내 삶에 등장했다.
문득 나에게 던져진 그녀들은 내 삶의 본질을 약간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맥주를 마시며 하기도 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