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물론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룻밤 사이에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누구나가 자신만을 위해 떠들어 대며,
다름과 틀림이 혼동되는,
때로는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위태롭게 나무에 걸려 높이 솟아 있는,
그리고 그 거짓 진실이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런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 어떤 객체와도 엉기지 않는 자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서든 밝게 빛날 수 있는 자신만의 옷차림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논쟁에서 져줄 수 있는 재치도 있어야 하며,
진실을 외칠 때 상대를 압도하는 언변도 있어야 한다.
저녁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안주인을 칭찬하는 멘트를 알고 있어야 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포크 중 무엇을 먼저 사용하는지도 알아야 할 때가 있다.
가방에는 시 집 한 권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돈을 사용할 때는 조심스럽되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보다 중요한 건,
내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옆에 머물러주는 친구 한 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 친구 한 명은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다른 건 없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며,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며,
내가 원하는 세계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
드디어 희형의 원고가 끝이 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는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트는 한 장 한 장 희형의 원고를 뱉어냈다.
나는 희형의 원고의 윙윙 소리를 내며 원고를 뱉어내고 있는 프린트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책의 마지막에 말한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친구 한 명에 대해서.
가람이도 떠올랐고, 소리도 희형도 떠올랐다.
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세 사람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두 부를 인쇄해서 한 부는 편집장 책상에 올려놓고, 한 부는 가방에 챙겨 넣었다.
비가 많이 왔다.
정말이지 지독히도 많은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졌고, 나는 그저 비를 맞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산도 우비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만큼 많은 비가 내린 것이다.
뉴스의 일기예보에서는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립니다.”라는 뻔한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꽤 예쁜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오늘같이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일기예보 따위를 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비가 많이 온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텐데. 거기다 그게 직업이긴 하겠지만 일기예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표정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다. 누가 보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사실은 고작해야 오늘 한 낮 최고 기온은 몇 도입니다, 서울지역에 몇 mm의 비가 내리겠습니다, 따위를 전하면서 말이다. 한낮의 최고기온이 몇 도인지 또 몇 mm의 비가 내리는지 때문에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까. 가령 태풍이 몰려온다거나 지진이 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쓰나미가 몰려오는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가끔씩 농담을 섞어가며 가볍게 일기예보를 전해주면 좋겠다. 이건 뭐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희망사항이다.
하필 우비를 챙겨 오지 않았다. 나는 비가 오면 우산보다는 우비를 입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양 손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손이 두 개 인 이유를 내가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분명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 상 두 손을 쓸 준비를 해야 하고, 우산은 그것에 적합하지가 않다.
우비를 챙겨 오지 않았으므로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었다. 젖는 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다만 아쉬운 건 제대로 피지 못한 벚꽃들이 새 차 게 내린 비 때문에 모두 다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건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타이밍이란 게 있는 것이고, 그 타이밍에 도달하기 전에 져버리는 꽃잎은 역시나 가여운 존재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이미 떨어져 버린 꽃잎에는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나는 비를 맞으며, 땅에 떨어져 있는 벚꽃잎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방엔 희형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오늘 희형에게 원고를 전해주면 이제 내 일은 끝이다. 물론 희형이 오케이를 한다면 말이다. 대략 한 달 쯤의 작업이 이제는 끝난 것이다. 그녀는 원고를 확인할 것이고 별 문제가 없다면 이제 파리로 돌아가도 된다. 그러니까 내 가방 안에 있는 희형의 원고가 그녀에겐 파리행 비행기표인 것이다. 그녀는 한국을 떠날 것이고, 날 떠날 것이고, 그리고 파리로 갈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원고를 받아 들고 이젠 한국에서 모든 일이 끝나버린 희형의 표정을 보기 싫었다. 그녀가 가버리고 난 후 난 무얼 해야 할지 도무지 잘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돌려 집 앞 바로 향했다. 그간 원고 작업 때문에 바빠서 한동안 가지 않았었는데. 바에 가지 않으니 소리를 본 지도 오래되었다. 아마 바에 가면 소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녀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비가 새 차 게 내렸고, 길 위엔 벚꽃잎이 가득했으며 난 희형의 원고를 가방에 넣은 채 바로 향했다.
그곳엔 소리가 있을 것이다.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멀리 구석진 테이블에 소리가 보였다. 나는 주인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소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맥주를 주문했다. 비가 많이 와서인지 바는 한산했다. 턴테이블 위에는 밥 말리의 레코드가 돌고 있었고 “No women no cry”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저 노래의 제목이 아직까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소리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맥주잔은 소리 앞에 힘 없이 놓여 있었다. 잔 안의 흰 맥주 거품은 늙은 동물의 가죽처럼 늘어져 있었다. 맥주를 시킨 지 한참이 된 것이다. 바의 주인은 내가 주문한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서 넌지시 오늘 소리가 이상하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건넸다. 눈빛으로. 세상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는 게 너무나 많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소리가 이상하다’
나는 맥주를 절반쯤 마실 때까지 일부러 아무 말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소리가 말을 하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맥주잔을 몇 번인가 툭툭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라고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한 마디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다. 심각한 일인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마른 입술을 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을 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생각의 끝에도 정답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마시지도 않는 맥주잔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가끔씩 자신도 잘 모르겠는 문제들이 누군가와 말을 하면서 풀리기도 해.”
“가끔씩은?”
“응. 가끔씩은 그래. 나도 그랬던 적이 몇 번 있었고.”
그제야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가 시원해 보이지 않는데 차라리 새로 한 잔 시키는 게 어때?”
“그렇긴 하네요. 뭐 괜찮아요. 얼른 마셔버리고 다시 시키죠 뭐.”
말을 마치더니 그녀는 날름 나머지 맥주를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새로 맥주를 주문했다.
“자, 이제 한 번 말해봐. 별거 아니면서 심각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사실은 그게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요.”
“별로 말하기가 싫은 건 아니고?”
“그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사실 내 머릿속에선 생생한데.”
그녀는 절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 가장자리에 비벼 껐다. 소리는 담배를 끝까지 피운 적이 없었다. 끝까지 피우면 맛이 이상하다고 한다.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시절 담배는 구하기 어려웠고 그만큼 귀했으므로. 절대적으로 끝까지, 마지막 한 모금까지 피웠어야만 했었다.
“그럼 오늘 그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가장 처음을 이야기해봐. 그러면 계속해서 말할 수 있을 거야.”
“가장 처음?”
“응. 가장 처음. 세상에 대부분의 일들은 처음만 시작되면 모든 게 술술 풀리기 마련이야. 왜 술도 첫 잔이 어렵고, 거짓말도 처음이 어려운 것처럼. 일단 한 번 시작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들었는지 흘러가버리게 된다고.”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남자의 아내가 찾아왔어요.”
소리의 그 남자의 아내가 소리를 찾아왔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해졌다. 사실 소리의 그 남자도 나에겐 선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건 무슨 일을 하건, 아내가 있건 말건. 그렇게 나에게 선명하지 않았던 소리의 그 남자와, 그 남자보다 더 선명하지 않은 그 남자의 아내를 우리 이야기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데 나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소리에게는 만나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아내가 소리를 찾아왔다.
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눈빛을 보내자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아내가 찾아온 것이 오늘 상황의 처음이에요. 자, 아저씨 말대로 처음을 시작했으니 이제부터는 생각는대로 말해 볼게요. 뭐 어떻게든 말은 이어지겠죠.”
소리는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데 소리의 웃음은 무거웠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 나는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을 시작하기 전 두 번째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뭔가를 그렸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형태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이블 위 그녀의 손가락에서 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제 아침에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어요.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거예요. 번호를 확인해보니까 그 사림이었어. 이상한 일이었죠. 왜냐면 오늘은 전화가 오는 날이 아니었거든요. 전에도 말했지 만 그 사람은 목요일 저녁에만 연락을 하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목요일이 아니었잖아요.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불안해지는 거야. 헤어드라이기를 잠시 멈추고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어요. 불안한 전화벨이 멈추기만을 기다렸어. 분명 그 사람은 아닐 거란 확신이 있었어요. 저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 전화를 받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온몸의 피가 귀에 몰린 것처럼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전화벨은 정확시 열일곱 번 울리고 멈췄어요.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분명 다시 전화벨이 울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그땐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다시 무시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죠. 그리고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난 전화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곧바로 받아버렸어요. 두 번 울릴 틈도 없어 한번만에.” 소리는 말을 마치고 크게 한 숨을 내 쉬었다. 목이 탄다는 듯 새로 나온 맥주를 벌컥 들이마셨다.
“전화를 건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남자의 아내였단 말이지?”라고 내가 물었다.
“네. 그 사람의 아내였어. 목요일이 아니면 그 사람은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목요일이 아닌 날에 그 사람의 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그 사람의 아내밖에 더 있겠어요?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 그 사람의 아내구나.” 소리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다시 두 번째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뭔가를 그렸다. 동그라미 같기도 했고 무슨 단어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너무 불안했는데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이제 모든 게 끝이구나. 더 이상 어떤 불안한 가능성도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진 거죠.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담담하게 여자와 이야기를 했어요.”
“불안한 가능성이 사라졌다...” 나는 조용히 소리의 말을 중얼거려봤다.
“여자가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요. 10시에 합정역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자고. 나는 알겠다고 했어요. 지금 머리를 말리고 있는 중이어서 30분쯤 걸릴 것 같다고. 10시까지 가는 건 문제없을 것 같다고. 남편의 외도를 알아버린 여자와, 남편의 불륜녀의 대화치 곤 참 건조하죠? 무슨 비즈니스 미팅처럼.”
“세상에 특별한 대화란 건 애초에 없어.”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다시 이었다. “대화라는 게 뻔한 거지. 말을 하는 사람과 그 말을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성립하는 거야. 거기에 평범하고 특별할 게 뭐가 있겠어. 물론 되도록이면 공평한 대화가 좋겠지. 한 명만 말하고 한 명은 계속해서 듣기만 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서로 피곤해지는 거니까. 안 그래?”
“되도록이면 공평한 대화. 그럼 어제 내가 한 대화는 공평하지 못했어요. 계속해서 그 여자만 말을 했고 나는 듣기만 했거든요. 나는 아무 말 도 할 수가 없었어. 물론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완벽하진 않지만 뭔가를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여자의 한 마다가 날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녀가 뭐라고 했는데?”
“가엽다고 했어요. 내가 가엽다고.” 소리는 이 말을 하고는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 속에 영원의 공간이 있는 것처럼 한 번 파묻혀버린 소리의 고개는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리의 맥주잔도 내 맥주잔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렀고 바의 주인인 턴테이블 위의 레코드판을 교체했다. 밥 말리의 음악이 끝나고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나는 소리 옆으로 자리를 옮겨 숙이고 있는 소리의 뒷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할까요?” 소리는 여전히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글쎄. 어쩌면 내일이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바에서 나와서 골목길을 걸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리고 바에서 소리의 집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에도 벚꽃잎 수만 개가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꽃잎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술을 마신 탓도 있었지만 구차해 보였다. 이미 온몸은 흠뻑 젖어버렸는데 떨어진 꽃잎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내년 봄이 되면 벚꽃나무는 다시 꽃을 피울 텐데. 그렇게 꾸준히 삶의 과정을 반복해나가고 있는데. 고작 나 따위가 조심한다고 한들 커다란 흐림이 바뀌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소리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이제 더 이상 그 남자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픈 건지 아니면 그 여자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가엾다고 느껴서 슬픈 건지. 그리고 나는 그런 소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저기.” 내가 그녀를 불렀다. 빗소리 때문이었는지 소리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다시 한번 소리를 불렀다.
“소리야.”
“응?” 소리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소리의 온몸도 비에 젖어 있었다.
“나는 네가 가엾지 않아. 나는 네가 좋아.”
나의 말에 소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정말 소리가 좋았다.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딱히 할 말 은 없다. 내가 지금 소리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아저씨 내가 좋아요?” 소리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응.”
"왜요?"
"나중에 널 떠올리면 난 분명 울어버릴 거야. 그래서 네가 좋아."
"그게 내가 좋다는 말이에요?"
"응. 내 옆에 네가 없으면 난 슬플 테니까."
“나도 아저씨가 좋아요. 아저씨는 불안하지 않아.”
“불안하지 않다고?”
“응. 불안한 사람은 언젠간 변해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랬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좋다는 말이지?”
“네. 나는 아저씨가 좋아요.” 소리는 살면서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함께 비를 맞으며 소리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걸었다. 소리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젖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는 커다란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았다.
소리와 나는 함께 누웠다. 몸에는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걸 닦아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몸을 겹쳐 안은 채 우리는 잠이 들었다. 나는 소리를 안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왠지 오늘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시간은 새벽 4시였다. 옆에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몸에 담요를 두르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 위에 소리가 웅크려 앉아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소리 옆에 다가가 앉았다. 옆에 앉아 보니 소리는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소리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다시 담요 하나를 더 가지고 나왔다.
“따듯한 차 한 잔 마실래?” 내가 소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소리는 고개를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있잖아요. 아저씨. 사실 나 누군가에게 내가 좋다는 말을 들은 게 어제 처음이었어요. 아무도 나에게 좋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었어. 그 남자도. 그냥 내가 필요하다고만 말했었어.” 그녀가 내 어깨에 고개를 좀 더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은 채 소리를 더 깊숙이 안아주었다.
“그래서요.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제저녁 소리의 말처럼 날 좋아하느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감정을 확인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물으면 모두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요. 아저씨는 좋아요. 그냥 좋아요.” 내가 아무 말하지 않고 있자 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우린 다시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멀리 거실에 한 귀퉁이에 내 젖은 가방이 보였다. 아마도 그 속에 희형의 원고는 흠뻑 젖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