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배신하는
이별은 없다

보름달은 별을 삼킨다

by 최전호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 집에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길고 긴 미로 같다.

수 백번이고 다녔던 길인데도 영 낯설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아니다. 길이 이상한 게 아니다. 내가 술에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게 정상이고 나만 정상이 아닌 것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은 세상의 배려를 바라서는 안된다.

입에서는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섞여서 났다. 내 옷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깊게 비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리고 옷 안에 감추어진 내 몸에선 소리의 냄새가 났다. 내 몸에서 다른 사람의 채취가 난다는 게 나로서도 낯선 일이었다. 어색했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기분이 꽤 좋은 쪽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원래는 출근을 해야 하지만 어제 희형의 원고 작업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오늘은 쉬기로 했다. 편집장도 건조하게 알았다,라고 하셨다. 어쨌든 난 일정보다 일을 일찍 마무리했고 내가 편집한 원고도 별다른 수정사항 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제 복잡한 미로 속에서 집에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나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커다란 미로의 한가운데 놓여 있으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나 때문에 말이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비 냄새가 한 움큼 들어왔다. 젖은 몸이 떨리는 듯도 했다. 벚꽃 스무 그루를 지나 왼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까만 아스팔트 도로 위, 맨 혼 뚜껑 두 개를 지나 지난해 새로 지어진 회색 원룸 건물 앞을 지나갔다. 좁은 골목길이다. 길이 너무나 좁아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가 마주친다면 한 대는 후진으로 물러서야만 하는 그런 좁은 골목이다. 아침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가로등엔 붉은색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밝기를 감지하는 센서가 고장 난 듯했다. 가끔씩 동네 할아버지는 고장나버린 가로등을 보고는 공무원이 하는 일이 다 이렇지, 이런데 내 세금을 낭비하다니, 따위의 불평불만을 늘어놓곤 하셨다. 하지만 역시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 나는 정작 불만이 없다. 아침이지만 골목길은 붉은빛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더군다나 차 두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는 이런 좁은 골목엔 더더욱 말이다.

골목의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른쪽 방향에는 큰 카페가 두 곳 있었다. 정말이지 큰 카페였다. 저렇게 큰 곳에 손님이 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몇 번인가 했었는데 다행히도 두 카페 모두 손님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차 두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는 골목길을 따라 커다란 두 곳의 카페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두 카페 모두 가본 적이 없다. 카페가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생각을 미뤄두고 다시 집에 돌아가는 것에 집중한다. 차 두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서서 세 번째 연립주택 건물이 바로 나의 집이다. 주인이 3층에 살았고 나는 1층에 살고 있었다. 주인 얼굴은 집 계약서를 쓸 때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이 집에 사는 6년 동안 우리는 세 번 만났다. 처음 계약서를 썼을 때와 2년마다 다시 재계약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동네를 한두 번쯤은 오가다 마주칠 법도 했을 텐데 우린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적어도 몇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인은 멀리서 나를 알은 채 했을지도. 다만 내만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엔 커다란 결함이 있으니까. 그런 결함은 나보다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쯤 집주인은 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짧고 간단하게 말한다. “더 살 거요?” 그럼 난 대답한다. “네.” 그리고 이틀쯤 뒤에 집주인은 계약기간이 갱신된 새로운 계약서를 가지고 온다. 나는 세 군데에 사인을 하면 된다. 그렇게 두 번의 재계약을 해서 6년째 살고 있는 우리 집 앞에 나는 무사히 도착했다.


집 현관문 앞에 섰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기나긴 미로의 끝에 힘들게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적막이라니. 이곳이 내 집이 맞는지가 이제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 주머니도 찾아보았어.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열쇠를 찾기 위해 옷에 달려있는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다 뒤져보았지만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 일은 6년 동안 한 번도 없었는데. 정신을 집중해서 천천히 어제 상황을 복기해보았다. 어제 집을 나선 뒤 나는 열쇠를 꺼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제 소리 집에서 옷을 벗어둘 때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열쇠는 지금 소리의 집 거실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다시 소리의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열쇠를 찾는 걸 포기하고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지난번 집을 재계약할 때 현관문을 번호키로 바꿀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집주인이 현관문이 낡지 않았느냐며 바꿔주겠다고 했었는데 난 괜찮다고 했다. 그 거절이 지금에 와서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번호키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기라도 한다면 정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리 집에 드나들 수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집의 문을 열쇠로 연다고 하면 조금은 망설일 것이다. 그건 조심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것에 비해 번호키는 현관문 앞에서 낯선 사람을 더 당당하게 만든다. 번호키는 몇 번의 실패를 눈 감아준다. 집주인이라 하더라도 번호쯤은 한두 번쯤은 번호를 잘 못 누르거나 두 번호를 겹쳐 눌러서 틀릴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집주인이 키를 꼽고는 잘 못 돌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 열쇠와 나는 일종의 신뢰 관계로 강하게 묶여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아직까지는 열쇠가 더 좋다. 그런데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난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세 번쯤 문을 두드렸는데도 집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었나 보다. ‘희형이 어디 간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문제다. 희형은 나에게 말을 하고 외출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할 수 없이 사람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희형이었다. 나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약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작게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는 잠시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전히 현관문 앞에는 적막이 있었다. 나로 하여금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이 견고한 벽을 만들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는 희형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반대로 문 앞에 나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나는 젖은 나의 신발 끝을 바라봤다. 여전히 물기가 축축해서 내 뒤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러므로 난 어쨌든 내 발로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건 내 발자국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옷이 다 젖었잖아.” 희형이 내 손을 잡고 나를 집 안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평온한 말투였다. 나는 아무 말하지 못했다. 젖은 옷을 벗지도 않은 책 부엌의 식탁의자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아무런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희형은 어제 아무것도 먹지 않은 건가? 싱크대에도 음식의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우리 집에서 무얼 하며 지내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희영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나왔다.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 놨어. 가서 몸 좀 담그고 나와.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희형은 양말부터 바지, 셔츠까지 내 옷을 벗겨 주었다. 그제야 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여전히 나는 아무 말하지 못했다. 희형은 아직 소리의 채취가 남아있는 내 옷을 가지런히 접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왜 빨래통에 집어넣지 않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물어볼 힘이 없었다. 나는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몸을 담그자 천천히 몸 전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 끝부터 시작해서 팔뚝을 지나 어깨를 거쳐 얼굴까지. 온기가 전해지는 그 길을 온전히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따듯해지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비로소 집에 도착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나오자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희형은 소파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바지는 입고 있지 않았었고 커다란 하얀색 티셔츠(저건 내 옷이다. 아마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부실하게 털털 거리며 돌아가던 세탁기가 고장 났다. 나는 일주일 동안 빨래를 하지 못했었고 가지고 있던 옷들이란 옷은 모조리 땀냄새가 가득했다.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어지자 집 앞 지오다노 매장에 들어가 세장에 만원을 주고 샀었다) 안에 다리를 집어넣고는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난쟁이 같았다. 머리카락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2센티 정도 길어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앞머리가 눈썹을 모조리 가렸다. 팬티는 입고 있었지만 브래지어는 하고 있지 않아서 웅크려 앉은 그녀의 무릎 사이로 가슴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난 그녀의 알몸을 보아도 흥분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여성적으로 매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희형은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얼굴도 작았고 눈도 상당히 컸다. 희형의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이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몸은 조금 왜소한 편이었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왜소함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탄탄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여러모로 상당히 예쁜 여자.

“기분은 좀 괜찮졌어?” 희형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응. 한 결 좋아졌어. 아까는 열쇠가 없어서 당황했었거든. 내가 집을 제대로 찾아온 건지 확신도 없었고. 우리 집인데도. 이상하지?”

“열쇠는 가방 안에 있던 걸. 젖어버린 내 원고와 함께 말이야. 내 원고라는 걸 알 때까지 한참이나 걸렸다고. 도대체 어제 얼마나 비를 맞은 거야? 어린애도 아니고.” 희형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열쇠가 가방 안에 있었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주머니만 뒤졌어. 그래도 잃어버린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나는 대답을 하며 희형의 옆에 앉았다. 따듯했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그냥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그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느낌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도무지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원고는 다 젖어 버렸지? 미안해. 당신이 한번 검토해봐야 하는데.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거야. 내가 출근하면 다시 한 부 뽑아다 줄게.”

“아냐 괜찮아. 다시 살펴보지 않아도 돼. 뭐 당신이 했으니 잘 했겠지. 그리고 이미 내 손을 떠난 원고야.”

“정말 괜찮겠어?”

“응. 괜찮아.”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싱겁긴.”

우리는 그렇게 잠시 함께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건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떨어져 있던, 원래는 하나였던 것이 다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이는 것. 어머니와 자식처럼.


“커피 마실래? 아직 아침 전이지?”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연히 아직 아침 전이지. 기억 안 나? 정확히 30분 전에 당신이 내 잠을 깨웠다고.” 희형이 장난스럽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 대신 아침은 내가 준비할게.”

나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커피콩을 갈았다. 그리고 턴테이블의 스위치를 올려 음악을 틀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간단하게 샐러드로 먹을만한 야채가 있었다. 오이와 양상추. 양파 절반에 당근 한 개. 그리고 샐러리와 파프리카.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씻어서 샐러드를 준비하고 토스터기에 식빵을 집어넣었다. 불은 중간 세기로. 희형은 살짝만 바싹한 토스트를 좋아했다. 버터와 딸기잼을 꺼내 놓자 주전자가 삑 소리를 냈다. 커피 두 잔을 내렸다. 집 안엔 커피 향이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평온한 아침의 모습은 나에겐 낯설었지만 편안하고 좋았다. 될 수만 있다면 평생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십분 만에 그럴싸한 아침상이 뚝딱 차려졌다.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집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그녀는 창문 앞에 서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 여름이 오려나 보네. 바람에서 여름 냄새가 나.”

“여름 냄새? 그게 뭔데?”

“약간은 바다 냄새랑 비슷해.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난 알 수 있어.”

“나도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갖고 있는 그런 능력이. 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도무지 쉽게 믿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그러니까 세상을 절반만 이해하면서 사는듯한 기분이야.” 나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녀는 토스에 딸기잼을 고르게 발랐다. 그리고 토스트의 테두리부터 조심스럽게 베어 물기 시작했다.

“맛있어. 잘 구워졌네.”

“고마워. 난 여름 냄새는 못 맡아도 토스는 제법 맛있게 잘 구우니까.”

“그것도 특별한 능력이라고.”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내가 물었다.

“당연한 거 아냐? 오히려 나는 누군가를 싫어해 본 적이 없는걸?”

그녀 다운 대답이었다. 그녀는 정말 누군가를 한 번도 싫어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을 품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도 그녀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나도 누군가를 싫어해본 적이 없다. 다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은 누군가를 싫어한 적도 없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대로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품고 있는 감정에서 조차도. 누군가를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공평한 삶. 그런데 그게 행복한 삶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불행하지만 않는다면 행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죽고, 아버지가 날 싫어하고, 가람이가 죽은 후 나는 그냥 살아온 것이다. 감정의 기복을 자제하고, 세상에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는 말이야. 지금껏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어. 누군가 내가 좋다고 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런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거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나는 열정이 없었으니까." 나는 머그컵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는 컵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의 질문에 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제는 분명 큰일이 있었다. 소리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날이다. 그건 가람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다. 물론 가람이는 남자였고 소리는 여자였기 때문에 감정의 모양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두 사람에게 내가 갖게 된 감정의 결은 분명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런 감정을 다시 가질 수 있는 데는 분명 희형의 도움이 컸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고, 그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건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랑을 받고, 받은 그 사랑을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것. 나는 그런 과정을 어렸을 때 생략당한 것이었다. 절반 정도는 타의로, 그리고 절반 정도는 자의로. 그런데 희형과 함께 살면서 나는 분명 많은 부분 변화를 겪었다. 그건 가람이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줬을 때와 같은 경험이었다. 세상에 문을 닫고 살아가던 나에게 세상으로 나오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 문은 내가 안에서 단단히 잠그고 있던 문이었다. 그 문을 처음으로 가람이가 열어줬던 것이다. 그리고 가람이의 죽음 이후 다시 닫혀버렸던 문을 희형이 열어줬다.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온 나는 소리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분명 스스로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감정에 있어서 난 희형에게 어느 정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마치 도움을 받고는 그것을 제대로 갚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려버리는 것 같았다.

“……”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항상 그녀는 그랬다. 마치 나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항상 괜찮다고 해줬다. 그래도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의 감정 때문에 나에게 미안해하지 마.”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건 그건 괜찮은 거야.”

“사실은 당신 말이 맞다. 난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그래서 집에 오면서 당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어. 당신이 없으면 당신에게 미안한 내 감정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런데 반대로 당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또 마음이 아파. 당신이 없는 걸 상상하기가 어려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지?”

“내가 말했잖아. 괜찮다고. 나는 당신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게 너무 좋아. 그거면 충분해. 자, 우리 얼른 커피나 마시자.”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저 마셨다. 집에 돌아올 때 느꼈던 묘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항상 모든 건 제 자리를 찾아간다.


“원고가 마무리됐으니까 이제 파리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커피잔을 씻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겠지.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 거야. 더 이상 한국에서 할 일이 없어진 거니까.”

“파리로 돌아가면 다시 글을 쓸 거야?”

“아니. 글은 이제 안 써. 글 쓰는 건 이제 됐다 싶을 정도로 썼으니까. 조그만 공방을 차릴까 생각 중이야. 난 뭔가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예쁜걸 한 곳에 모아두는 것도 좋아하거든. 이래 봬도 그런 부분에 있어선 글 쓰는 것 못지않게 꽤 재능이 있다고.”

“공방이라. 꼭 한 번 구경 가고 싶네. 당신이라면 정말 잘 할 거야.”

“응. 꼭 와. 파리 구경도 시켜줄게. 파리는 상당히 예쁜 도시야.”

“그럼 우리 이제 곧 당신은 나를 떠나는 건가?”

“아니. 세상에 떠나는 건 없어. 그냥 잠시 떨어져 있는 거야.”

“세상에 떠나는 건 없다...”

“응. 당신과 나의 마음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떠나는 게 아니야. 변하지 않은 마음을 배신하는 이별은 없는 거야. 세상에는.”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떠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배신하는

이별은

없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