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족관계서가 갱신되었습니다

04. ‘우리는 지금 눈이 오는 곳’ 뉴욕으로 도망쳤지(3)

by 제인


유품수령실 안의 또 다른 문이 열리자는 남은 유품들이 투명 상자에 넣어진 채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수령을 원하시는 품목은 이중 포장해서 전달해 드릴 거예요.”


장광일은 목록이 적힌 종이를 내게 건네고 살펴본 후 빈칸에 체크해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급히 떠났던 걸까, 각자가 아끼던 것들은 살던 집에 모두 둔 채였다. 나는 한 상자의 뚜껑을 열어 앨범을 꺼냈다. 엄마가 이렇게 활짝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나는 앨범의 첫 페이지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흩어지기 전 세 식구의 모습은 친구들의 가족사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담겨있고, 둘의 아이가 태어나고, 자식이 처음 지면에서 발을 떼던 순간을 기록하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어떤 계절도 놓치지 않고 모두 담게 해주겠다는 의지마저 보였다.


아버지가 아저씨를 데려온 날, 둘은 같이 요리해서 밥을 먹고, 설거지 후에는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다. 나는 엄마가 앉던 자리에 앉아 아버지가 사 온 팝콘을 신나게 입에 넣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자고 가.”


“무슨 소리야?”


“여선이 주말에나 올 거야.”


“그래서, 뭐. …… 자고 가는 건 안 해.”


“…… 괜찮아. 여선이가 2층 손님방에 묵어도 된다고 했어.”


“모르고 한 허락도 허락이니?”


“어쨌든, 오늘은 자고 가. 성용아, 아저씨 자고 가도 괜찮을까?”


팝콘 부스러기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로, 나는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없으면 숙제도 미룰 수 있었고, 단것도 먹을 수 있었고,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낮에 가르쳐준 공차기도 내일 다시 연습해 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휴지 곽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팝콘 가루를 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내일 공 차는 거 또 알려주세요.”


“그래. 그런데 아저씨 오늘 갔다가, 내일 다시 올게. 괜찮지?”


“자고 가요. 아빠랑 우리 둘이 큰 집에서 무섭단 말이에요.”


“무서워?”


“네! 우리 집은 엄마가 지키는데, 엄마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날 보다가 아프지 않게 이마에 꿀밤을 주고는 크게 웃었다.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유머 감각 멋지지 않냐?”


“사실을 말하는 건데, 이게 무슨 유머야, 그렇지 성용아?”


나는 캐러멜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서 과자를 먹거나, 특히 음식을 먹던 손으로 책을 보는 일은 절대 금지였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비울 때마다 몰래 그런 일들을 하게 해주셨다. 단순히 내게 허락된 일탈에 마음을 뺏겨 뭐든 다 좋다고, 아버지도 친구와 하루 잘 수 있는 일탈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잠들기로 약속한, 밤 10시에 2층으로 올라갔다.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에서 깼을 때 손님방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 ‘아빠도 친구랑 있을 때가 더 좋나?’ 나는 아저씨가 사 온 내 몸만 한 인형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아버지의 부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금요일 저녁까지 우리와 함께 지냈다. 매일 시내로 나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두 번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나는 아저씨가 있어서 재밌다고 말했었다. 엄마는 왠지 서운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 보고 싶어, 그렇지만 아빠가 떼쓰는 거 아니랬어. 주말에 집에 오니까 씩씩하게 기다리는 거야’라고 어른인 것처럼 흉내 내며 어깨를 폈다. 엄마는 내 말에 웃었고, 아버지는 내 뒤에 서서 미소 지었다.


오로지 아저씨만 고개를 돌리고,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편지 속에 적힌 그 이름을 끄집어내, 기어코 어머니 옆에 세워 두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그때의 어머니는 견딜 수 없었을 거다. 그 무엇도 봐줄 수가 없던 거였다.


앨범을 덮고 상자 안에 넣었다. 의자에 앉아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대부분에 ‘V’ 체크를 한 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집은 팔기로 했기 때문에, 유품들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대여할 생각이었다. 어머니와 살지 않더라도 뉴욕 집으로 모두 가져갈 수는 없었다.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밤에 눈 예보가 있네요.”


“그래요? 이제 다 된 건가요?”


“수령 거부 품목 폐기 동의서에 서명해 주시고, 폐기 후에는 폐기 확인서를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확인했다는 회신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 제가 회사 서비스를 살펴보니까 ‘탐정 연계’도 해주시던데요.”


“아, 네. 의뢰 필요하신가요?”


“네, 부탁드립니다.”


“10층에 상담 창구가 있어요. 제가 담당 부서에 연락 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자에 올려둔 짐을 챙겨 들었다. 밖으로 나왔는데 앞 방은 여전히 닫힌 채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는 그와 악수를 나눈 후 모니터에 층수를 누른 후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투명창이 있어 각 층의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이곳 직원들은 억지로 미소 지을 일이 거의 없겠다고 생각하며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왼쪽 가슴 위쪽에 친절 사원 배지를 달고 있는 중년 여성이 빠르게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망으로 감싸 올린 단정한 외모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미소에 그녀가 친절 사원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성용 님이시죠? 담당자께 연락받았습니다. 3번 창구에서 잠시 대기 해주세요.”


그녀가 내민 대기 번호 종이를 받아 들고 창구로 갔다. 3번 창구에서 상담 중인 남자는 무엇 때문인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자판기에서 커피와 우유를 뽑았다.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잠을 거의 못 자 몽롱한 상태여서, 실내 온도가 따뜻해 바닥에 누워 잠부터 자고 싶을 정도였다. 우유를 반 잔 정도 마신 후 나머지를 커피 컵에 부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메일함을 눌렀다. 긴급 메일과 아닌 것을 분류하고 회신이 필요한 것들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3번 창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담사가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씨발, 결국 불륜이 맞았잖아…….”


남자가 지나가며 한 말이 귀에 꽂혀 그를 돌아보았다. 손에 쥔 종이를,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구기더니 안쪽으로 가 고객용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윙 소리와 함께 종이는 회색 플라스틱 통에 눈처럼 하얗게 쌓였다. 그는 정수기 앞에서 찬 물을 연신 마시더니 한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아 천장을 보았다.


“35번 고객님, 3번 창구로 와 주세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일어서서 창구로 가는데 대기실에서 보았던 여자가 10층에 내리는 것을 보았다. 여자도 나를 알아보았다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이런 곳에서 자꾸만 마주치는 사람이라니, 서로에게 피로한 일이 분명했다.


“의뢰서 드릴 테니, 작성해 주시겠어요?”


의뢰 목적:

[의뢰의 상세 내용은 배정된 조사관과 별도 장소에서 확인할 예정입니다. 조사는 의뢰 건에 따라 소요 기간이 다르지만, 최대한 빠르게 조사가 완료될 수 있도록 특별 요청이 가능하며, 이 경우 추가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의뢰 목적에 사람을 찾는다고 쓰고 ‘한형규’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런데 그를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걸까.


그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알려준 공차기 기술을 쓰면서도 더 이상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상담사가 의뢰서를 바탕으로 요청하는 사이, 나는 시큰거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머금었다.


“피곤해 보이세요. 빨리 처리해 드릴게요.”


“네, 잠을 못 자서요. 배정은 언제쯤 되나요?”


“긴급 건으로 체크해 주셨네요. 내일 오전까지 담당자가 연락드릴 거예요. 제 명함 지금 전송해 드릴 테니 혹시 연락을 못 받으셨다면 저에게 전화 주세요.”


의뢰서 사본을 받아 유품 리스트 파일에 집어넣었다.


“완료됐습니다. 눈이 오네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창가에 서서 목도리를 두르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허기, 이제야 찾아온 공허함, 아버지의 부재와 참을 수 없이 외로웠던 순간들. 모든 것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나를 휘감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오는 사이 눈발은 더 굵어졌고, 사람들은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습관처럼 주머니 안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저기요.”


그녀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상자를 안은 채였는데, 상자 위에 우산이 올려져 있었다.


“이런 부탁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면, 택시 승강장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그러죠.”


나는 우산을 집어 들었고, 그녀는 상자를 꽉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인 후 고맙다고 말했다. 우산을 펼친 후 사람이 아닌 상자에 눈이 떨어지지 않게 집중했다. 승강장에는 이미 대기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상자를 단단히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이 얼마나 내리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손을 밖으로 뻗었다.


“외국에 사세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귀가 밝거든요. 아까 통화…….”


“아……. 그런데 누구의 유품인가요?”


“아버지요. 그쪽은요?”


“저도 아버지요. …… 10층에서 또 마주칠 줄 몰랐어요.”


“그러게요. 10층엔 무슨 볼일이 있으셨어요?”


“탐정…….”


“이 회사, 징그럽게 완벽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웃자, 그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대기 중인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나는 곧 도착한 택시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녀는 상자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구겨 올라탔다.


“고마웠어요. 우산 가져가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나중에 돌려주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물러서며 차 문을 닫자, 그녀는 눈으로 인사한 후 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우산을 들고 서서 발치에 쌓이는 눈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아버지. …… 죽지 말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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