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몰랐으면 좋았을 일들
서림은 호텔 로비 앞에 주사위처럼 생긴 소파들 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벨벳 커버가 씌워진 스툴을 가져와 앞에 놓고 다리를 올려 뭉친 종아리를 손으로 주물렀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조용히 다가와 서비스 음료를 건네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올겨울은 지겹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패딩 주머니 속에 넣어둔 찜질팩이 점점 뜨거워지자, 그녀는 팩을 주머니에서 빼 손에 쥐었다. 우산을 털며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로 성용이 보이자,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는 일주일 사이 더 야위었고, 눈가는 더 푹 패어 있었다. 도통 먹지를 못한 것인지, 서림은 그를 식당으로 데려가 수저를 쥐게 한 다음 뭐라도 먹이고 싶었다. 다가오는 성용을 뒤로하고 일 층에 있는 디저트 카페로 먼저 들어섰다.
“뭐 먹을래요? 괜찮다는 말은 하지말고요.”
“전 진짜 괜찮은데. …… 그럼 커피?”
“자리 잡아줄래요?”
성용이 구석의 창가 자리로 가 목도리를 푸는 것을 보자 그녀는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캐모마일 티 한 잔, 오늘의 샌드위치 하나요. 그리고 스콘 두 개는 따로 포장해 주세요.”
이틀 전 걸려 온 성용의 전화에 만날 수 있다고 답했던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난 장소가 문제였던 건지, 우연한 만남이 자꾸만 걸렸던 건지 사람 만나는 걸-게다가 새로운 사람 극도로 피곤해하는 서림이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는 말에 직장 동료인 우리는 실눈을 뜨며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첫눈에 반하고 그런 거예요?”
“첫눈에 알아보긴 했지.”
“어머! 뭐를요?”
“안 됐다.”
“안 됐다? 그게 뭐죠?”
“유품 찾으러 간 곳에 나랑 똑같은 표정을 한 사람이 있었지. 가는 데마다 자꾸 부딪혀. 건드리면 울 것 같고 죽도록 피곤해. 오늘 하루가 꿈 같아, 밖에는 미친 듯이 눈도 내려. 지저분한 감정들, 눈이랑 같이 파묻고 진실 같은 거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다.”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등을 돌려 모니터에 시선을 두었다. 새로 내린 커피를 따른 후 향에 마음을 맡겼다. 지금은 어디에라도 다 떠넘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소단 씨 찾았습니다. 주소 전달해 드립니다] 서림은 어머니가 만난 마지막 불륜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잊으려고 애쓴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망할, 그 이름. 이름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다는 것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끝 사랑’이라는 헛소리를 해댔었는데 실상 아버지의 마지막엔 아무도 없었다. 그게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곁에 그녀는 왜 없었는지.
성용은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가 접시를 들고 카운터로 다시 가 직원에게 무슨 말을 했다. 잠시 뒤 돌아온 그의 손에는 햄이 빠진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이거 다 성용 씨 거니까, 천천히 드세요.”
그는 캐모마일 티백을 건져 올린 후 컵 끝에 걸쳐 두었다. 서림은 가지런하게 정리된 그의 손톱에 시선을 두었다가 긴장하면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지 엄지손톱 옆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슷한 곳에 피가 맺혀 있었다. 서림은 휴지로 손가락을 감싸고 그 부분을 꾹 눌렀다.
“만나보셨어요?”
“네. 성용 씨는 찾았어요?”
“찾았는데 만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 여자, 감옥에 있더라고요.”
샌드위치를 씹다 멈춘 그의 볼이 천천히 움직였다. 서림은 그의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 미친… 죄송해요.”
“아니오.”
“진짜 미친년인 거 있죠. 그런…… 인간한테 우리가 휘둘렸다고 생각하니까 때려 죽여도 시원찮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감옥엔 왜 갔어요?”
“사기 전과 6범이래요. 내내 떴다방 얼굴마담이었다는데 이번엔 무슨 종교 집단에서 사기를 치다 걸렸대요. 종교 집단도 사이비인데 사이비랑 사이비가 손잡고 나란히 빵으로 들어간 거죠. 아름다운 결말 앞에서 굉장히 허탈해지지 않나요? 아버지 그년한테 다 뜯기고 자살했거든요. 아, 다 뜯긴 건 아니네요. 진짜 다 뜯길까 봐 회사에 사전 계약을 걸어뒀더라고요. 딱 하나 남은 재산이라고는 집이랑 그 집에 있던 우리 물건들. 엄마랑 제 유품이 될 물건들요. 엄마가 다 가지라고 했으니 저는 그 지긋지긋한 기억들이랑 같이 태워버려야죠.”
서림은 쉴 새 없이 말한 터라 숨이 찬지 앞에 놓인 물을 급하게 다 마시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가 흥분하면 말이 빨라져서…….”
그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티백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흥분할 만하네요.”
그는 반도 못 먹은 샌드위치를 종이에 다시 싸더니, 스콘이 든 종이봉투에 넣었다.
“계속 못 먹어서, 갑자기 먹으려고 하니 힘드네요. 저는 흥분하면 장기가 오히려 식는 것 같아요. 살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들에 제동이 걸려요.”
“불륜녀 찾았어요?”
“이쪽은 불륜녀가 아니에요.”
“그럼?”
“아버지가 외도한 사람은 남자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 것 같고, 마지막도 그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여버리는 꿈을 아직도 꾼다고 했는데, 저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미워할 수 있나. 어떻게 하면 죽이고 싶다고 이어질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끝내고 싶은 게 맞는 걸까 수없이 생각했어요.”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한 서림의 눈앞에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펼쳐졌다.
“충격받았어요?”
“조금요. 미친년이랑은 다른 종목이네요.”
그가 손등으로 입을 거리고, 웃자 서림은 뿌듯한 표정을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웃겨 줬으니까, 다음 얘기해 주세요. ……그 사람, 죽은 거죠?”
“네. 우리, 그러니까 엄마랑 저는 뉴욕으로 떠났고 그다음 일은 잘 몰라요. 탐정님 조사에 따르면, 그 사람이 아팠나 봐요. 죽기 전까지 많이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매일이 고통인 사람은 자신이 언제 떠날지도 느껴지는 걸까요? 아버지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뉴욕으로 와서 저를 만났고 곧 자기가 죽는다고 했어요. 그때 전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죽을병 걸린 애인의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저를 찾아왔던 거죠. 같이 떠나야 했으니까, 모든 준비를 같이 한 거예요.”
“아버지는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 걸 느낄 수나 있었을까요? 죽는 것까지 다 자기 마음대로 한 사람인데. 평범한 사람이 하는 사랑이 얼마나 하찮아 보이겠어요.”
“미친년 놈들이 도처에 있네요.”
그의 비꼬는 말투가 왜인지 그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서림은 소파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가지 끝에 걸렸던 짙은 오렌지빛은 점차 검어지고 곧 눈앞에는 나무의 실루엣만 남을 테였다.
“서림 씨는 이제 뭘 할 건가요?”
“글쎄요. 그쪽은요?”
“전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뭔데요?”
“그분의 딸이 저를 만나고 싶대요.”
또 한 번 서림의 입이 벌어지자, 성용은 찻잔을 치우고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앞으로 가져와 한 번에 마셨다.
“하…… 이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서림 씨?.”
“축하해요. 얼굴색 돌아왔어요. 그 사람 만날 거예요?”
“네. 사실 궁금해서요. 그 사람도 저를 궁금해하는 것 같고.”
“저는 성용 씨랑 얘기하고 있다 보면 소설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책인데요?”
“읽으면 스산해져서 인파가 많은 곳에서 다음 책장을 넘기고 싶은……?”
또 그가 웃었다. 서림은 다 마신 잔들을 챙긴 후 그의 손에 종이봉투를 들려주었다.
“또 만나요.”
“인파가 많은 곳에서 만나죠.”
“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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