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연연하는 그림일기 - 멀리 떠나지 않아도 과거의 풍경들이 찾아오면
방랑자들 - 올가 토카르추크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기억은 천천히 홀로그램의 심연을 열기 시작한다. 어떤 날들은 아주 손쉽게 끄집어낼 수 있다. 또 어떤 날들은 시와 분까지도 명확히 떠오른다. 고정된 이미지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같은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마치 모래밭에서 고대의 해골을 발굴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뼈 한 개만 보이지만, 솔질을 계속하다 보면 점차 다른 부위가 나타난다. 그러다 마침내 복잡한 인체가 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p436
<방랑자들>을 읽으며 와닿았던 부분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기억은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와 나를 멈칫거리게 한다. 멈칫거리는 중에도, 젠가에서 나무 조각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전체가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이는 순간이 오더란 말이다. 살아난 기억은 더 선명해져서 내 얼굴을 붉히게 하거나, 그때로 돌아가 한숨을 퍼올리게 하거나, 눈시울을 짓게 했다.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떠나지 않아도 과거의 풍경들이 찾아오면, 당할 재간 없이 그대로 그 속에 잠겨 회상하고, 후회하고, 부끄러워하고, 유약했던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펭귄을 그려보았다. 아델리펭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녀석들의 성격, 습성이 꽤 흥미로웠다. 다른 동물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바닥의 아델리는 다른 의도는 없고 그저 내 영역에 들어와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싫을 뿐이라는 것, 누가 먼저 바다로 뛰어들 건지 눈치를 보다 누구라도 먼저 뛰어들면 그제야 몸을 던지는 것.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진 아델리는 처음 발견한 사람의 아내 이름이라는 것. 수컷과 암컷이 번갈아가며 새끼를 품고, 먹이를 먹고 돌아올 때까지의 여러 날동안 남은 펭귄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귀엽게 생긴 외모지만, 서늘한 눈빛과 성격을 가진 아델리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거뚜라,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마랏!
크릴새우를 먹는 아델리의 배설물은 분홍색을 띠고 있어서 펭귄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의 이동경로가 뻔히 보이다니, 그것 참 찝찝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안 내보낼 수도 없고. 어느 나라 활주로에 내린 순간, '그래, 너 여기 있네. 타국이니 조심하고, 알아둬야 할 정보는 아래와 같고, 혹시 필요하면 연락하고' 등의 메시지를 속속 받을 때 '다 알고 있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8B 연필과 찰필을 사 왔다. 진한건 진하게, 흐린 건 흐리게. 차가운 공기에 섞이는 날갯짓의 소리와 울음소리를 상상해 본다.
오늘의 그림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