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연연하는 그림일기 - 촛불 먼저 켜지, 축하주는 밤새 마실테니
직장인으로 살면서 내내 타임라인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닥칠 일을 대비해야 하고, 마음 졸이며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고, 달력을 한 두 달 치를 넘겨보며 이맘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다는 예상도 하다 보면 어느새 연말이 다가와 있었다.
명절이나 주말 상관없이 잔잔하게 쌓인 일거리 위에는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지금 당장 치워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주워 써야 할 것, 이게 뭔지 파봐야 할 것으로 가득했다. 가족들은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 회사 꼭 다녀야 하냐고 묻기를 수십 번, 그럼에도 '괜찮아. 일이 많다는 건 좋은 거고, 따박 따박 월급 나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라고 대꾸하면 '그건 그렇지만, 자기 생활도 없이 몇 년 째야'라고 또 우려 섞인 목소리로 주섬주섬 파스를 꺼내 건넸다. 팀원들 대부분이 허리, 목이 아프고, 손가락이 아프고, 팔꿈치가 나가고 눈도 침침하고, 그렇다고 퇴근하고 운동하러 갈 힘도 없고 그저 바닥에 누워 '오늘도 잘 버텼다' 한마디 하며 밥이라도 챙겨 먹으면 다행인 하루를 보냈다.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영원히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처럼 내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악몽을 꾸고, 잠자리가 개운하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면서도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이러다 실수라도 하면 큰일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움직이는데 예전 같지 않고, 내게 말 거는 모든 사람들이 귀찮아졌다.
그 마음을 받고, 답할 여유가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어떻게든 부득부득 밀어 공간을 만든 다음 또 하루를 버텼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경고 섞인 의사의 말에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는데, 문득 '이거 진짜 안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퇴사하기 좋은 때는, 내가 작정한 때. 더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 때.
나는 그렇게 회사를 그만뒀고, 회사를 그만두고도 퇴사했다는 사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직장인으로만 살아온 나는 내 뒤에 회사가 없다,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쉬면서 나를 다시 살리고, 돌보면서 회사 다닐 때는 쉬면서도 늘 신경 쓰였던 '인박스의 메일들'이 이제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해야 할 것 없는 온전한 휴식이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생각했다.
운동을 하고, 건강하게 잘 챙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자주 만나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부지런하고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사이 내 기분은 롤코를 타다 처박힐 때도 있었고, 동굴 속에 들어가 은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퇴사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잊었던 나를 찾은 것만으로도 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딱딱했던 머리가 풀리고 나서는 소설을 쓰는 것도 재밌었고, 성과를 낼 필요 없이 과정 중에 있는 내 모습이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가끔 일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조금만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나는 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지인은 삼 개월도 못 가서 일하고 싶다고 할 것 같은데?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휴식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일을 하러 간다. 일을 시작하면, 내 취미 생활도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을 떠올리며 소중히 지켜내고 싶다.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하는 A의 생일과 나의 다음 장을 위해 축하 케이크를 그려 보았다. 케이크 없이 그 그림 앞에 두고 파티해도 되겠다는 말에 한껏 뿌듯하게 마무리.
기대해, 다음에는 이단 케이크로 그려주마! 훗!
예전에 일할 때마다 들었던 노동요가 생각이 나 이곳에 남겨본다.
45분 만에 완성이라는 궁극의 제목을 가진 플레이리스트로, 동료들에게도 추천했다.
낮잠 NZ Ambience 채널 - 클래식 노동요
그리고 오늘은 곧 구시렁거리며(?) 일을 하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클래식좀들어라' 채널의
황후였던 저에게 명령하지마요 클래식을 추천해 본다.
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소중하다.
빌런들 사이에서도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그대들 매일 축배의 잔을 들라. 아, 촛불 먼저 끄고.
오늘의 그림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