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영-너는 나의 숨을 먹고(1)
아버지는 내 이름을 짓기가 귀찮아 집 전화번호 끝자리를 따 ‘사영’으로 지었다. 이름을 지었던 곳을 떠나왔지만, 번호도 내 이름도 그대로였다.
나는 엄마가 없었다. 나를 낳다가 죽었는지, 나를 키우다 죽었는지 아버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경기도 어딘가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면 나는 계단 아래쪽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유치원 봉고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뛰어나갔다. 혼자서도 거뜬하게 차에 올라 자리를 잡는 아이들과 선생님 품에 안겨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노란색 가방이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펴졌다가 구겨졌다가 했다. 차가 떠나면,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벽에 붙은 한글과 알파벳을 보며 매일 따라 읽었다. 더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요즘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한글은 기본’이라는 옆집 아주머니의 말에 그 집 아이가 하던 방문학습지를 같이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영 돈이 아까운지 선생님이 처음 방문한 날, 문을 열고 들어서는 뒤에 서서 한글은 언제 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쓰는 돈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 못해 한이라면서, 선생님이 올 때마다 배워서 뭐 하냐고 투덜거렸다. 나는 선생님이 몰래 건넨 막대사탕의 막대를 뚝 부러뜨린 후 사탕만 입에 넣고 천천히 빨아 먹었다. 입안의 사탕을 뺏길까 봐, 입을 앙다물고 볼도 최대한 오므렸다. 선생님은 틀린 문제는 별표로 표시했다. 틀리지 않았다고, 다음엔 틀리지 않을 거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공장 기계에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잘린 후 나는 선생님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퇴원할 때까지, 나도 병원에서 지냈고 보조 침상에서 잠을 잤다.
밥값이 없어 식사가 나오면 아버지와 나눠 먹거나, 같은 병실의 보호자들이 주는 간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병원 일과에 맞춰, 나도 일찍 눈을 뜨고 일찍 잠들었다. 아침엔 주사를 놓는 간호사를 따라 병실을 기웃거리거나, 간호사실에서 아직 빈 칸에 많은 학습지를 풀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손가락 두 마디를 물끄러미 보곤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 간호사가 들어와 진통제를 놔 주었다. 나는 잠이 든 아버지 옆에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연속극을 보았다. 옆 침대에 다리가 부러져 온 할아버지를 돌보러 온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재밌어 나도 깔깔 웃었다.
어느 날, 공장 사장님이 찾아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내 한껏이야’ 아버지는 쫓겨났고, 흰 봉투를 손에 쥐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돈이 없었다. 퇴원하던 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이삿짐을 쌌다. 아버지는 끝도 없이 사장 욕을 했고, 기계 탓을 했고,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집어 던졌다.
아버지와 내가 화주 군으로 이사 왔을 때 나는 여섯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 집을 처음 보았을 때,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좁은 집과 다르게 기다란 마루에 끝에서 끝 사이에 방이 세 개나 있는 게 신기해 자꾸만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창고를 정리하던 아버지는 마루를 닦던 나를 보며 왼쪽 끝 방을 쓰라고 했다. 그러면서 ‘돈 버니 어쩌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시집이나 빨리 가, 그게 제일 좋은 거야’라고 했다. 걸레를 움켜쥐고,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마루 끝에서 끝을 오가던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비전에 버려지는 아이가 많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어디에다 치워버리지 않고 데리고 왔다는 게 고마웠다.
우리의 정착을 도운 건 화주읍 풍영리 이장 윤철호였다. 그는 우리가 이사 오던 날, ‘마누라 없이 자식 키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자네도 장하네’라며 자신도 아내가 없다고 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머리가 크니 사사건건 부딪친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이장님이 좋은 사람 같다며, 잠이 들 때까지 막걸리를 들이켜며 그를 칭찬했다.
다음 날, 이장님은 사사건건 부딪친다던 아들, 호를 데려왔다. 호는 나와 일곱 살 차이가 났다. 초등학생인데도 키가 커서 이장님 키를 곧 따라잡을 것 같았다.
호를 처음 만났던 날, 나는 아버지 뒤에 숨었다. 내게 다가오며 짓는 그의 미소가 싫었다. 그의 큰 키도, 내밀던 손도, 볼에 가득한 여드름도 싫었다. 아니, 그가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끼익하며 철 대문이 내는 소리가 제일 싫었다. 처음부터 싫었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아 호 앞에 바치듯 나를 밀었다. 호는 허리를 숙여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엉망으로 땋아 묶은 내 머리를 향했다.
“나 머리 잘 땋는데. 내가 다시 땋아줄까?”
이장님은 호가 화주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며, 아버지에게 유치원에 보낼 거면 원장님께 특별히 말해주겠다고 했다. 화주 군에서도 제일 큰 병원인 화주 종합병원의 사모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말보다, 싸다는 말에 그럼 소개를 부탁한다며 허리를 숙였다.
빈 청주 병이 담벼락 아래 두 병 놓여 있던 날, 아버지는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며, 세상에 방금 나온 새끼 오리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는 아버지에게 소일거리를 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소개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가리고 ‘제가 부족합니다’라고 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