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영-너는 나의 숨을 먹고(2)
이장님은 안 되는 게 없는 사람인지, 나는 그의 말대로 곧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침에는 혼자서 유치원 버스가 오는 곳까지 걸어갔다. 끝없이 펼쳐진 논과 드문드문 보이는 비닐하우스를 따라 걸으며, 처음으로 배운 동요를 흥얼거렸다.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에 흙을 실은 차들이 산을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작은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쓰거나, 유치원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늦은 저녁에 봉고차 한 대가 와 서면, 나는 가방을 가져와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뛰어나왔다. 호가 다니는 태권도 학원 차 문이 열리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호는 항상 도복을 입고 있었고,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고 했다. 내가 다른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아직 어린 나를 보호하려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고집을 부리며 다른 자리에 앉았다고 없는 말을 지어냈다. 그 뒤로 호의 옆자리는 내 지정석이 되었다.
그해 12월 셋째 주,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유치원으로 봉사활동을 나왔다. 그들은 각 반으로 배치되어 놀이 활동, 책 읽기, 신체 활동을 같이했다. 그때도 호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내 옆에 오지 않았다. 가족을 그리라는 숙제에, 그는 크레파스를 집어 들더니,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뭐가 재밌는지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기념으로 내가 가진다’ 그는 스케치북을 찢어 자기 가방에 넣었다.
호는 내 머리에 손을 올리거나, 내 어깨를 감싸 쥐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은 호가 친오빠 같다며, 그를 칭찬했다. 그는 집 밖에서 나를 부르다가,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준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내 방에 들어와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가 무섭다고 했다. 아버지는 ‘걔가 키가 커서 무서워 보이는 거지, 아주 순한 애라니까. 오빤데, 뭐가 무섭다고 그래. 오빠 말이 곧 아버지 말이야. 그러니까 말 잘 들어’라며 흙 묻은 장갑을 벽에 치며 먼지를 털더니, 일이 많아 늦게 올 거니 기다리지 말라며 집을 나섰다. 그날도 아버지는 문 앞에 서 있던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호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는 이제 그가 없이도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학교를 마치면 버스 정류장까지 쏜살같이 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부엌으로 가서 밥그릇에 참기름과 간장을 넣은 뒤, 밥을 퍼 담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삶은 달걀을 꺼내 원피스 주머니에 넣고 곧장 달려가 방문을 잠갔다.
이른 저녁, 호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그는 잠긴 방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문고리를 돌렸다가, 포기한 듯 신발을 신었다. 그는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되지 않자, 창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그의 목소리로 불리는 내 이름이, 아버지가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그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그렇게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던 날들이 지나고, 첫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학원에서 보자는 말을 하며 헤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었다.
그날 나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 있는 큰 슈퍼에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종이를 들고, ‘이게 무슨 글자야’ 중얼거리면서도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아 재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문이 열리자, 뒷문으로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중에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앞에 앉았다. ‘야, 윤 호! 네 동생 아니야? 너 어디 가냐?’ 호는 내 앞에 서더니 가방을 내 허벅지에 올렸다. 그러더니 내 이마에 맺힌 땀을 자신의 손날로 닦아 주었다.
읍내 근처의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서자, 그들은 오락실이 있는 쪽으로 요란하게 떠들며 사라졌다. 나는 슈퍼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슈퍼 아주머니께 목 인사를 한 후 곧 간장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싼 간장을 들고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손에 있던 종이를 뺏어 들었다. 호가 서 있었다. 그는 오락실도 포기하고 나에게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사 오라는 목록을 한 번에 읽어내더니 장바구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호는 슈퍼를 나오면서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는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마루에 눌러 닦았다. 그가 방에서 꺼내 온 건 손바닥만 한 다람쥐 인형이었다. 인형 뽑기 기계에서 어제 뽑은 거라며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받지 않자, 그는 비닐봉지에 인형을 넣고는 나를 안아 올렸다. 머리가 천장에 부딪힐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섭냐?’ 그는 나를 안은 채 문턱을 넘더니 곧 날 내려놓았다. 그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방 한편에는 동물 인형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뽑기를 한 번 할 때마다 돈을 얼마나 쓰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원하면 몇 개 가져가라고 했고 나는 됐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를 지나쳐 가더니 방문을 닫았다.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티셔츠를 올리는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돌았다. 호는 내 어깨를 잡더니 나를 돌려세웠다. 나는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잠기지 않은 문이 신경 쓰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는 내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떨더니, 이내 내 어깨를 세게 쥐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내 바지에 묻었다. 나는 그를 밀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왔다. 화장실로 가 옷을 벗고 대야에 담근 후 세제를 마구 뿌렸다.
세면대에 선 나는 손을 비벼 비누 거품을 만든 뒤, 두 손을 박박 씻었다. 거울을 보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망으로 붙어 있었고, 볼은 터질 것같이 부어있었다. 양말을 벗고 대야에 발을 담근 후 더러워진 옷을 밟아 빨기 시작했다.
밤 아홉 시에 아버지가 취한 채 이장님과 들어왔다. 이장님은 호에게 전화를 걸어 ‘사영이네 집에 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한 잔 더하자며 어깨동무하며 방에 들어가더니 이내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호는 내가 놓고 온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것들을 부엌에 내려놓더니 마당에 빨아 널어놓은 옷들에 시선을 두었다. 그는 마루에 앉아 안방에 널브러진 두 사람을 보다가 방문을 밀어 닫았다.
그때 내가 한 생각은 ‘지금 뛰어나가면 그의 손에 닿지 않을 수 있을까, 밖을 나가면 어두운 시골길을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 그는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을까’였다. 그러나 나는 생각의 끝에 닿지도 못한 채 방에 끌려 들어갔다. 그의 헐떡이는 숨이 등에 닿았다.
나는 또, 잠그지 않은 문이 신경 쓰였다.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몰랐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새벽에, 그가 이장님을 깨워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건조대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아버지의 코골이가 순간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