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전한 이야기

03. 사영- 너는 나의 숨을 먹고(3)

by 제인


여러 번의 방학이 지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호는 좋은 오빠 행세를 하며 내 옆에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던 그가 찾아왔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핸드폰에 기록되었다. 그는 나의 애원 섞인 말을 모두 먹어 버린 후, 내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거친 말들로 응수했다.


내 말은, 내 의도와 다르게 변형되고, 망가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 안에서, 나는 그의 힘에 흔들리며, 그럼에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가 문을 잠그면, 그는 문고리를 돌렸다.


그때 내 소원은 하나였다.

그 틈새로 빛도 스며들지 않는 것, 그것뿐이었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치던 날, 학원으로 가던 나를 호가 불렀다. 그맘때 호는 중학교 동창 아버지가 운영하던 컴퓨터 수리 회사에 취직했는데, 출퇴근 시간도 지키지 않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여 나아지지 않으면 잘라 버리겠다는 사장님의 엄포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가 다시 나타나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가던 친구를 불렀다. 그는 내 가방을 끌어당기더니, ‘너 오늘 몸 안 좋다며. 아저씨가 학원 쉬고 집에 오래’라고 말하고는 친구를 향해 ‘잘 가라’라고 했다.


그는 집에 가는 길에 붕어빵을 사서 내게 건넸다. 나는 봉지를 끌어안았고, 그는 조금 탄 꼬리 부분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빵이 으깨지는 소리가 소름 끼쳐 나는 숨을 참고, 침을 삼켰다. 그의 방 침대에 눕혀졌을 때, 나는 서로 엉겨 붙은 붕어빵의 머리를 보고 있었다. 그가 바지를 의자에 걸친 후 다가오는 걸 보며 나는 말했다.


“임신한 것 같아.”


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게 내 애라는 증거 있어?’ 나는 순간 구역질이나 싱크대에 몸을 기댄 채 머리를 숙였다.


‘그것’과 ‘증거’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그는 그것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답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화주 종합병원 원장의 큰아들인 김정무 라는 사람의 소개로, 생각보다 간단한 절차를 밟고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수술을 받았다.


그날 이장님의 트럭에는 아버지가 타 있었고, 나는 그들의 뒤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는 싫다는 나를 억지로 들어 올리더니 안방에 눕혔다. 그리고 잘 먹어야 한다며 죽을 내밀었다. 나는 죽 그릇을 던지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쓰던 욕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를 피해 이불속에 숨은 나는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리고 밤새 끙끙 앓았다. 아버지는 ‘학교 마치면, 호한테 시집 가’라고 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말리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에서 나오는 나를 기다렸고, 중고차를 샀다며 나를 조수석에 태웠다.


“괜찮아. 나중에 우리 결혼하면 또 가지면 되지.”


나는 그 해괴한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미성년자 임신, 낙태’라는 단어를 검색하자 합법과 불법, 보호자 동의, 미성년자가 임신한 수많은 경우에 대해 조회가 되었다.


그가 나에게 한 짓은 무엇인가.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결과들을 하나씩 열어보다 깨달았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원히 찾지 못할 거라는 것. 그 이후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당하는 데는 언제나 이유가 없었고, 나를 위해 손을 뻗을 사람도 없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람들은 모른 척하는 것이 마치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조무사 학원에 다녔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는 화주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그는 항상 교대가 끝나는 시간에 전화했고,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환자로 입원했다가, 퇴원하던 날에 내게 핸드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넸던 남자는 다음 날 다리가 부러져 다시 입원했다. 나는 그 부러진 다리가 호가 남긴 흔적이라는 걸 알았다. 다가오는 남자를 다 받아줄 거냐는 그의 말이 우스워 미친 듯이 웃었다. 그날 나도 뺨을 맞았고, 아무도 보지 못할 몸 곳곳에 상처를 달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말했다. 나의 시간, 내 생각,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말했다. 너무 말해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잘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23살, 나는 모두의 예상대로 그와 결혼했다.


나는 날개뼈에 생긴 멍 때문에 호가 마음에 들어 했던, 등이 파진 드레스를 입지 못했다. 대신 목까지 올라오는 디자인의 드레스로 바꿔 입었다, 팔등에 생긴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목이 긴 장갑도 낀 채였다.


그는 주례사 중에 내게 속삭였다.


“드디어, 하네.”


이후에도 나는, 여전한 삶을 살았다.




소독되어 올라온 봉합 세트를 정리하며 이 포를 펼치면 가위가 있고, 메스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나는 언제나 나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호가 잠이 들면, 미친 사람처럼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새벽 내내 허겁지겁 숨을 주워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가워진 몸을 누이면, 그가 달라붙어 내 숨을 빨아먹었다.


나는 숨을 아끼듯 말을 아꼈다. 곧 맞아 죽을 것 같아도 그가 하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호는 나에게, 이대로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아이를 가지면 좋아지겠지’ 나는 그 말이 무서웠다. 그가 침대로 기어들어 왔던 3월의 하루하루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내 위에 올라탔고, 볼일이 끝나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는 곧 이불을 끌어다 내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일을 마친 아버지가 두 손을 부딪쳐 장갑의 먼지를 털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두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때마다 내 다리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아이를 가진 3월도, 그 아이를 낳은 1월도 지독한 추위에 담요를 몇 겹이나 감쌌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는 내 속에서 열 달을 꽉 채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이를 낳던 날에 호는 아이를 건네받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막 태어나 붉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이 만들어낸 흔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나도 그랬다.


그와 내 사이에 있는 저 생명체를, 나는 원한 적이 없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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