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전한 이야기

05. 사윤- 너는 나의 체념을 먹고

by 제인

잠든 엄마의 손목을 쥐어 보았다. 엄마의 손목은 가늘어서 내가 감싸 쥐어도 여유 있게 남았다. ‘우리 사윤이는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도 잘 치겠다’ 유치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우리 사윤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 그건 가족이 아닌 사람만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엄마를 찾아왔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얽기 설기로 엮은 나무 공 속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람을 타고 새처럼 날아올랐다. 구름 위에서 몇 바퀴나 굴렀을까, 마당에서 날 부르는 엄마를 발견하고 망설임도 없이 엄마의 품에 안겼다. 줄기는 다 풀어져 바닥에 뒹굴고, 내 몸은 타래처럼 얽혀 엄마를 감쌌다.


그건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고, 꾸며낸 것도 아니라고. 내가 엄마를 찾아온 게 맞다고, 선생님만 내 말을 믿어 주었다.


나는 여섯 살 생일이 지나고서도 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조각 퍼즐을 맞추던 나는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들어 올리고 쭈뼛거리며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은 실수한 나를 데리고 샤워실로 가, 괜찮다고 말하며 서둘러 씻겨 주었다. 허리에 큰 수건을 두르고 밖으로 나와 빈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내 이름이 적힌 사물함에서 속옷과 바지를 꺼내 입혔다.


“엄마 올 시간 다 돼가네? 오늘 간식도 조금만 먹어서 배고플 텐데 우유 좀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 오겠다며 일어섰다. 부루마블을 꺼내 상자 뚜껑을 열었다. 나는 파란색, 가상의 친구를 위해서는 노란색을 선택했다. 주사위를 던지고 숫자를 확인한 후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가, 여러 나라의 땅을 샀다.


“사윤이, 엄마 기다리는구나?”


아저씨는 원장님의 남편인데, 가끔 원장님을 데리러 유치원에 왔다. 아저씨는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혼자 남은 나와 놀아주기도 해서,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밖에 서 있던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우유 가지러 가셨어요.”


“아저씨는 원장님 보러 왔어. 게임 같이할까?”


“네, 좋아요.”


아저씨가 자리에 앉자 곧 선생님이 우유를 가져왔다. 아저씨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나무 책상에 컵을 올려 두었다.


“선생님, 늦게까지 수고하시네요. 제가 사윤이랑 게임하고 있을 테니까 가서 일 보세요.”


“괜찮아요, 제가 있을게요.”


“아니에요. 사윤이 엄마도 곧 올 텐데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 요즘 재롱잔치 준비하느라 바쁘시잖아요. 사윤이, 아저씨랑 잘 놀 수 있지?”


“네! 아저씨는 노란 비행기 하세요.”


선생님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아저씨는 밖을 보려는 듯 허리를 세우고 목을 길게 뺐다.


“왜요?”


“아니야. 우유 마셔.”


생각해 보니, 엄마는 저녁 식사를 앞두고 간식 먹는 걸 싫어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부를 테고, 밥을 남기면 엄마가 화낼지도 몰랐다. 내가 먹기 싫어졌다고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내가 도와줄게’라더니 금세 반 컵을 비웠다. 그러고는 남아 있는 우유를 보라며 컵을 흔들고는 내게 내밀었다. 입에 우유를 묻히고 웃는 아저씨가 재밌었다. 나는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시다, 곧 턱을 타고 검은색 티셔츠에 흐르는 우유를 보고 놀라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 엄마한테 혼나겠다.”


아저씨는 티셔츠 위, 인쇄된 글자에 떨어져 흡수되지 않은 우유를 검지로 찍더니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위로 아저씨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3초 안에 먹으면 괜찮다? 자, 남은 거 어서 다 마셔버려. …… 근데 우리 사윤이는 입술이 참 도톰하니 예쁘다. 아저씨 딸은 입술이 얇다고 투덜대거든.”


남아있는 우유가 아저씨의 손 안에서 출렁거렸다. 나는 컵을 가져와 재빨리 마셨다. 입술에 남은 느낌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팔등으로 문질러 닦으려는 찰나, 아저씨가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털이 수북한 아저씨의 팔이 내 팔등에 닿았다. 꼼지락거리며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발가락은 아저씨의 손에 가둬졌다.


선생님이 나를 데리러 오기 전까지 나는 게임 상자에 남아있던 여분의 비행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주사위를 굴리고 내 것과 자신의 비행기를 한 칸씩 옮겼다. 아저씨 혼자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황금 카드를 열어보며 즐거워했다. 엄마가 왔다는 말에 나는 아저씨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만든 모래성을 보고 있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가 뒷좌석에 올라탔고, 엄마는 나를 힐끔 보더니, 젖은 바지가 담긴 비닐봉지를 조수석에 두었다.


“자꾸 그냥 싸버리면 어떡해. 선생님이 씻겨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쉬 마려우면 마렵다고 말하란 말이야.”


“갑자기…… 나와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차가 움직였다. 엄마는 한숨을 쉬어댔고, 나는 자꾸 소름이 돋아 손바닥으로 팔등을 감쌌다. 아저씨의 행동에 대해 엄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엄마를 또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계속 문질렀다. 얼마나 문질렀는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엄마는 냄새나는 티셔츠를 벗긴 후 수건을 내 목에 둘렀다. 쪼그리고 앉으면서도 내가 자꾸 입가를 만지작거리자, 엄마는 얼굴을 씻기던 손으로 내 손등을 내리쳤다.


“하지 마! 빨개지잖아!”


“…… 엄마. 엄마, 내일 저 일찍 데리러 오면 안 돼요?”


“왜.”


“혼자 있어서 무서워요. 유치원 봉고차 타고 오면 안 돼요? 할아버지 댁에 가 있을게요.”


“안돼. 할아버지도 그 시간엔 없어. 그리고 내일은 엄마 늦게 끝나는 날이야.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유치원에서 기다려. …… 알았니?”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엄마를 얼마나 기다렸던 엄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키를 잴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내 키가 친구들보다 큰 것이 싫어서, 엄마는 영원히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에 띄면 안 되는데 자꾸만 눈에 띄어서 엄마를 아프게 했다.


엄마가 시장 한가운데 날 두고 서둘러 갈 때도, 놀이공원 다람쥐 통 속에서 내가 앞뒤로 움직이고 있을 때도 엄마는 나에게서 도망치고, 멀어지려 했지만, 나는 엄마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엄마가 너무 잘 보였다.


내가 발을 세우고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어깨를 몇 번 움찔거리다 마지못해 뒤돌았다.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에 있는 것, 엄마였다.


To be continued…


다음 화


아버지의 말이 맞다. 나는 더러운 아버지의 더러운 새끼였다. 아버지가 그 약속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엄마가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나를 매일매일 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 그러다 방바닥 아래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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