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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3. 2020

점점 더 멀어지게

정승환 - 바람


 창틈 고인 물에 손가락을 대보다 크게 숨을 뱉으니 하얀 입김이 퍼진다. 누군가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과 지난밤의 망설임이 떠올라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식히려 두 발을 억지로 바닥에 댄다. 그가 마시고 간 물병이 식탁 위에 그대로 있다. 어젯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을 벗겨주고는 침대눕혀 주었다. 숨도 쉬고 싶지 않다는 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그의  눈빛 안에 내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나에게 보이는 그의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진다. 그는 두 눈 안에 나를 담고 웃어 보였다. 슬프네. 나는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던 그의 두 손은 내 머리 위에 한참을 머무르다 사라지고 말았다. 돌아서서 그가 간다. 가다 서고 가다 서는 소리에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침을 삼켜 목을 축이고 그러다 잠시 돌아보던 순간까지 나는 보지 않았으나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입술을 떼어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침대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한 번쯤 하고 싶은 말을 해도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곁에 두고 싶다는 말. 우리는 침묵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묻어둔다. 당신을 잃게 되느니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되뇐다. 그가 들었을까. 멀리 그의 내음이 사라진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트렸다.


 흐려진 하늘은 비라도 내릴 것처럼, 선잠자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낸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안에 그가 건넨 쪽지가 그대로 있다. 펼쳐보기 두려워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작은 종이들은 언젠가 가방 안에서, 지갑 안에서, 코트 안에서 발견되었다. 금서처럼 나는 그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가 없다. 무엇이 두려우냐 묻는 누군가에게, 나는 그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슬픔을 비추며 고개를 떨군다. 두려움이 아니라 슬퍼서라고.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낮게 읊조린다. 하늘은 그의 어린 마음처럼 푸르고 비를 품은 나는 그를 안을 수가 없다.


그대 날 돌아서서 떠나는
발걸음에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려

떨어지는 꽃잎 같아서
가여운 사람
이대로 끝내야만 해서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이 오면 그땐 헤어지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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