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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01. 2020

해, 달, 별 그리고 우리

 대학을 졸업하고 누나의 편의점에서 일하며 취직 준비를 한 지도 1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12월 어느 밤, 주체할 수 없는 입김에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신호등을 빠르게 건넌 매형이 편의점 문을 열었다. 매형은 손님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를 정리한 후 익숙하게 테이블 위를 닦고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삼각김밥에 맥주를 들이켜며 누나가 곧 죽을 거라고 말했다. 목부터 눈까지 붉어져선 누나가 곧 죽을 거라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때 나는 손님이 흘리고 간 동전을 줍기 위해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무의미하게 흘러간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나는 '아, 그래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기 앉아있는,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았던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져서. 같이 붙들고 울어버리면 다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 누나는 마치 며칠 정도면 될 것처럼, 우린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사라져서 결국 죽어서야 볼 수 있었다.


누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돌아오던 길에 우리는 휴게소에서 산 커피를 차 밖에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하얀 하늘 위로 치솟았던 입김과 가만히 있어도 추위에 떨리던 몸,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마치 우리 같았다는 것 뿐이었다.

 

 매형은 넥타이를 매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간식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뒤돌아섰다.


왜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그렇게 단정 짓지 말고. 제까지 우리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생기거나, 버겁다고 느껴지면 말 할게요.


내 어깨를 짚은 손힘을 주었다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안해서 그래. 미안해서.


나는 돌아서서 다시 칼을 쥐었다. 채 썰린 당근, 채 썰린 감자. 나는 오목한 그릇에 그것들을 담았다.

누나는 매형의 구두굽 소리가 좋다고 말했었다. 복도를 지날 때 나는 그 소리가 멋있다고. 그냥 매형의 모든 게 좋다고 말해. 지금 이 순간도 심드렁한 표정의 나를 누나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아이작은 손을 붙잡았다. 현재에 사는 나는 자꾸만 과거의 우리를 떠올리고 있다. 나와 누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림처럼 서 있었고 그는 건너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를 알고 있었다. 



 

  사고 이후 꾼 꿈 대부분은 현실처럼 뚜렷한 악몽이었다. 악몽에 시달리기 전엔 귓가에 윙윙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잠들면 안 돼, 오늘도 악몽에 시달려선 안된다. 곧 누군가 내 두 다리를 붙들더니 배 위에 올라앉아 외친다. 눈을 뜨면 눈을 떴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검은 물속으로 깊이 잠긴다. 분명 물속인데 화마는 모든 것을 덮고 비명 소리는 불과 물에 휩싸여 들리지 않게 된다. 눈앞의 나는 나를 구하려 소리를 지르고 눈물과 검둥이 벅이 된 얼굴로 손을 뻗는다. 소리도 지를 수가 없다. 눈을 뜨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땀이 눈물처럼 흐르면 그제야 현실임을 깨닫는다. 새벽 3시.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깨닫는 시간, 가로등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고 나방들은 겁지 않다는 듯 모여들고 있었다. 오늘도 그가 보였다. 여러 번 같은 시간에 마주쳤던 그와 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엔 그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


아이가 질주하듯 달려오다 결국 작은 돌멩이들에 발을 헛디뎌 내 무릎 위로 쓰러졌다.


  한잔 하자는 내 말에 대답 없이 돌아섰던 그가 걷다가 다시 멈췄다. 그는 이마 위에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곧 정오인가. 날씨가 무더워지고 있다. 땀에 젖은 셔츠는 점점 달라붙고 있었다. 1시간 뒤에 단지 내 놀이터에서 볼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뒤 단지 내 놀이터. 그의 말을 곱씹으며 벤치에 드러누웠다. 아...갑자기 단 게 당기네.


너도 누군가를 만나. 일렁이는 물결이, 너를 집어삼킬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에. 너를 안아줄 누군가를 만나렴.



봄을 틔우며 무더웠던 여름을 지나 분홍빛 가을 외롭고 긴 겨울을 건너 머나먼 저 지평선 고난의 바다를 건너서 내게 달려와준 너에게 난 정말 고마워

산다는 게 그래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허나 그렇더라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네 곁에 있다는 것

사랑한다는 말이 가끔은 서툴고 흔들리겠지만 날 믿어달라는 그 말 그 말의 무게로 버거울지라도 그래도 나는 좋아 기약 없는 청춘의 한가운데 사랑하는 우리가 있으니 우리가 있으니

신승훈 - 해, 달, 별 그리고 우리 (With 김고은)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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