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가늘고 긴 꿈이 있어 -4

나만 연연하는 그림일기 - 마음도 더하고, 실력도 더하고

by 제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꽤 지나 돌이켜보니, 첫 직장이 내게 준 경험이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맡았던 업무는 실험실에서 가공이 끝난 섬유를 테스트(수축, 마찰, 마모 등) 하는 일과, 거래처에서 의뢰한 컬러를 원하는 직물에 염색 후 샘플들을 송부하는 일이었다. 첫 사회생활, 처음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맞는 건지 감도 못 잡고 뭐든지 서툴렀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선배는 '여기서 뭘 얻고 싶은지,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봐. 아무도 떠먹여 주지 않아'라고 했다. 선배 입장에서는 고민하고 망설이다 뱉은 말이리라. 선배의 말이 끝나자 나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 스스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 내가 한심하다 느껴질 때였다. 출근하기도 싫고 일도 싫어 아침마다 꼼지락 댔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따끔한 말을 해주니 부끄러워졌다. 실험실의 고압기 돌아가는 소리와 증기 빠지는 소리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샘플링 작업대와 한 벽을 메우고 있는 다양한 직물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우리가 흰색이라고 칭하는 색에도 다양한 색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건 그저 하나의 색일 뿐이었지만, 밝기가 더해진 흰색, 회색기가 도는 흰색, 푸르고 노르스름한 흰색 등 셀 수 없이 많은 색이 만들어지고 다른 색이 더해져 새로운 색이 구현되었다. 그 직물들 앞에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배운 것들을 다시 곱씹고,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음 날 할 일을 끝내놓고, 선배에게 염색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업무 외에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팀의 업무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도 물었다. 팀장님은 달라진 내 모습이 기특하셨던 것 같다. 작업대로 불러 가운을 건네시고는 도움이 될 거라고 이론을 알려주시고, 색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어떻게 하면 색이 잘 나오는지도 열심히 설명하셨다. 선배와 나는 샘플 컬러를 앞에 두고 이 색이 맞냐 아니냐로 열띤 토론을 하다가 결국 각자가 결정한 색을 거래처에 모두 보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실수도 하고 경험도 쌓고 신뢰도 얻었다.


직물 위를 지나는 가위질과 실험실 일이 익숙해졌을 무렵, 거래처에서 찾아와 내가 한 직물 테스트와 자사 공장에서 시행한 테스트 결과가 상이한 것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괏값이 좋지 않아 당장 가공 일정에 착오가 생긴다는 것을 알지만, 아닌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당장 일정에 맞춰 의류가 생산된 들 추후에 소비자가 불만족하게 되면 회사가 들여야 하는 비용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회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 우리 회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일을 잘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자부심은 비단 나만 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과정에서 신뢰를 주었을 때 생겨난다. 팀장님은 해당 공장에 가서 담당자와 미팅을 가져보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쪽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험을 재 시행했고, 내 결과 값이 맞았다. 나는 그날만큼은 어깨가 한껏 솟은 채 회사로 돌아왔다. 의뢰사에서 요구하는 감도 안 잡히는 수많은 샘플 컬러들을 대할 때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들은 그 느낌을 알고 의뢰하는 것인지 항상 궁금했지만 누군들 알 수 있으랴. '오, 이런 느낌인데 좀 더 단조 느낌으로 한 스푼, 아니면 이 컬러에 모래 바람이 지나간 듯한 그런 느낌? 느낌적 느낌?' 진짜 느낌을 찾아 헤맸던 날들이 지나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다른 길로 향했다.


가끔 샘플 원단과 실험실 냄새, 앞치마를 두르고 바삐 다니는 사람들, 현장의 공기와 비처럼 쏟아지던 가공된 원단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곳에 남았다면 내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어,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끼집사로 일하러 간 날(하하) 색연필이 눈에 띄어 복숭아를 그려보기로 했다. 복숭아는 그저 핑크색을 띠는 것이 아닌 붉은색, 노란색, 핑크 색, 갈색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나도 '그' 느낌을 찾기 위해 색을 더하고 더하고 손 끝에 힘을 줬다가 뺐다가 하며 복숭아를 그렸다. 서툴게 그린 그림에 내 감정을 담아 내 마음을 꽉 채우는 딱복숭아가 완성되었을 때 내 실수가 아니었던 실험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IMG_3085.jpeg 딱복? 물복? 05-Oct-2025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 '마음을 다한다'는 그 감정은 멀리 던져두게 된다.

'다음에, 아마 한 달 뒤에는 여유가 생길 거야, 아니 이 회사를 그만두면 여유가 생길 거야, 그럼 마음을 쏟을 무언가 찾아봐야지. 사회 생활 해봐라.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버티는 게 중요하다. 딴짓은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 있다, 금요일에 퇴근하면 절대 회사일은 생각하지 말아야지, 회사 쪽으로는 눕지도 않을 거야' 라며.

일이 힘들 땐 통장에 월급이 들어와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더 받아야 할 것 같고, 내가 요거 받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사실, 모두 알고 있다. 우리가 발버둥 치지 않는 이상 다음은 없을 거고, 한 달 뒤에 여유가 없을 확률이 높고, 회사를 그만두면 또 다음을 위한 마음을 쓰느라 더 좁은 문이 될 테고, 주말에도 다음 주에 해야 하는 일을 시뮬레이션 돌리고 있고, 업계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


그러니 첫 직장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썼던 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누군가에게 업무에 대해 알려줘야 할 때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혀 끝에 맴도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소리를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하는 게 정답인 건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 말고는 없다(시스템에 오류가 생겼을 땐 재부팅이 답)고 말해주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나에게 맞는 성향을 찾고 대입해 보는 것. 그래서 누가 알려준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지만, 일이 하기가 싫.... 너무 싫....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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