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유치원 원전 읽기
미셸 푸코의 열렬한 독자이자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는 푸코의 책 <말과 사물>을 읽고 한 장의 편지를 보냅니다. 바로 책 속에 담긴 ‘유사(resemblance)’와 ‘상사(similitude)’의 개념을 묻기 위함이었죠.
여기서 ‘유사’란 주인, 즉 근원이 되는 요소가 있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원본과 복제의 수직적인 관계를 뜻하며, 이는 근원으로부터 출발해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죠.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약화되며, 따라서 원본과 복제의 일치라는 인식론적 요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반면 ‘상사’는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을 뜻합니다. 원본과 카피의 관계가 아닌, 원복 없는 복제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건데요. 여기에는 원본이 필요하지 않고, 시작이나 끝도, 방향성도 없습니다.
푸코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지속적인 서신교환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그리트가 보낸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스케치가 담겨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이었죠. 마그리트의 스케치에 감명 받은 푸코는 미학에 관한 짧은 논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책을 살펴보기 전, 푸코의 앞선 저작인 <말과 사물> 속 ‘시녀들’에 대한 작품 분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작품의 내재적 분석을 통해 작품의 구조를 간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 구조와 맥락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화가가 정작 그려야 할 중요한 대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된 주제가 되어야 할 왕과 왕비는 사라지고, 방문객들만이 돋보인다는 것을 발견한 거죠. 푸코는 이를 모델이 사라진 재현으로 보고, ‘순수 재현’이라 명명합니다. 이러한 재현에는 대상을 재현하는 주체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사라짐을 재현하는 공간의 구조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는 고전적 재현의 재현, 그것이 열어 놓은 공간의 정의 같은 것이 있다. 그 재현의 사실 모든 요소들을 통해, 그 재현의 이미지들을 통해, 그 재현을 바라다 보는 시선들, 그 때문에 가시적이 된 얼굴들, 그 재현을 낳게 한 포즈들을 다시 드러내려 한다. 그러나 거기, 그 재현이 모아다 펼쳐놓은 분산 속에서, 본질적인 공이 사방에서 어쩔 수 없이 지시된다. 그 공은 재현을 낳은 것, 재현이 닮고 있는 자, 그리고 재현이 닮음에 지나지 않는 자의 필요불가결한 사라짐이다. 동일자인 이 주체가 생략되어 있던 것이다. 마침내 재현을 묶고 있던 이 관계에서 자유롭게 된 재현은 자신을 순수 재현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
‘시녀들’에는 재현의 목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표상, 예컨대 권력의 관계에 의해 설정되는 인간관계 등이 드러납니다. 가령 이 작품에서 왕과 왕비는 재현된 중심 이미지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그림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중심이 되죠. 그 힘은 재현된 인물들의 시선에 의해 그림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푸코는 ‘시녀들’에서 재현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그림 속에 투영하여 읽었던 겁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고전적 에피스테메의 주체가 그 스스로의 재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에피스테메란 ‘한 시대에 널리 퍼진 세계관 또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를 말합니다. 이 그림에서 왕과 왕비는 재현의 주체이지만 정작 그림에서는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 그림은 가시적 대상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의해 교차되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재현하고 있는데요. 푸코는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이 가시적 대상의 재현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현대 미술의 실험적 경향을 일찍이 예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읽어보도록 하죠. 이 책에서 푸코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석을 합니다. 프로이트에서 시작하여 달리와 마그리트로 이어지는 초현실주의자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거부하고, 마그리트를 칸딘스키나 파울 클레 등과 같은 계열로 놓고 분석을 진행한 것이죠.
우선 칸딘스키의 추상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까지의 그림은 사물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는 ‘유사’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형태와 색은 대상을 본딴 것이었죠. 반면 칸딘스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립니다. 오히려 그는 회화를 음악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비재현적인 미술을 시작한 겁니다. 이러한 경향을 이어 받은 현대 추상 화가들은 대상과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거부합니다. 사람의 색을 보라색으로 표현한 마티스의 그림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죠. 형태와 색이 바깥의 대상을 따라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해방된 겁니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스케치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이프를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은 것은 그림이 대상을 재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는 것이죠. 이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회화가 ‘대상의 재현’이라는 원리를 파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칸딘스키는 그 대상을 아예 담지 않았지만, 마그리트는 대상을 똑같이 그린 뒤 글을 통해 이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회화가 대상을 가리킨다는 고정관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즉, ‘회화의 본질은 대상의 지시’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그림은 파울 클레의 추상입니다. 중세시대의 미술에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한 공간에 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한 사건인 ‘수태고지’를 그린 그림에 이와 같은 예가 잘 나타나 있죠. 반면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가시적인 것의 재현에 집중합니다. 다시 말해,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회화 속에선 글자가 그림 속에 동시에 나타날 수 없었던 거죠. 글자는 그림 바깥으로 쫓겨나고, 제목 또는 사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파울 클레의 그림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공존하는 형태를 지닙니다. 기존 회화의 고정관념과 전통을 깬 ‘그림이자 글자’를 그려낸 것이죠. 마그리트의 스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자와 이미지가 한 공간에 들어가도록 한 것이죠. 이를 통해 마그리트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회화를 지탱해온 두 가지 축, 즉 ‘대상과 유사성을 지니도록 그려야 한다’는 원칙과 ‘글자와 이미지가 한 공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그리트가 전통 회화를 파괴하고 그 위에 세우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푸코는 이것이 유사(resemblance)를 파괴하고 상사(similitude)를 지향하는 하나의 움직임이라고 분석합니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그림에 동일한 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물이 누구인지, 실제 인물과 유사한지 등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형상적 모티브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뮬라르크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뿐이죠.
그는 이를 통해 기준이 되는 원본은 없으며, 사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의 동일한 형상 안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각적 가능성이 잠재하는지 알려준 것이죠. 그는 이를 통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시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낯설게 보도록 하는 현대 미술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