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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Aug 16. 2020

인생이 고통이고 세계가 최악인 이유 : 쇼펜하우어 읽기

철학유치원 원전 읽기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할 때 늘 ‘생각하는 존재’ 혹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동식물들과 달리 사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을 억제할 줄 아는 존재. 그 덕에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높은 문명의 탑을 쌓아올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죠. 여기 이러한 주류 철학, 그리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믿음에 반론을 제기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19세기의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그 주인공이죠.


쇼펜하우어는 1788년 독일의 단치히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당시 크게 성공한 상인이었다고 하는데요. 고지식하고 교양이 없었던 데다 추남이었다고 알려지죠. 반면 어머니는 나중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미모도 뛰어났는데요. 심지어 두 사람의 나이 차이까지 20살이나 났다고 합니다. 기질이나 성향도, 연령대도 맞지 않는 두 사람이 결합하다보니 불협화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평생 그가 보인 여성혐오적 발언과 행동도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있죠.


오늘 우리가 살펴볼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를 받은지 6년 뒤에 내놓은 작품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의지’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의지란 충동과 욕망 등을 의미하는 말인데요.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성과 합리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의지가 마치 볼 수는 있지만 몸이 불구인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힘센 장님과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어깨 위의 사람, 즉 이성이 지시하면 의지는 힘껏 달려 나갑니다. 이성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뿐, 실질적인 행동과 추진은 의지의 몫이라고 보았던 거죠.


그는 이런 다양한 의지 중에서도 ‘생식 본능’이 가장 강력하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인식이 이뤄지는 뇌보다 성적 충동이 발산되는 생식기에 더 강한 충동을 받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고상하다고 여기는 사랑의 감정은 사실 종족 보존을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이 하얀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종족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결점을 보완하려는 무의식적 결과물이죠.


자,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의지의 무한함과 충족의 불완전성에서 나오는 괴리입니다. 우리가 실제 삶에서 느끼는 것처럼 욕망은 늘 충족되기 어렵습니다. 또한 충족되었다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죠. 고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벗어났다 싶으면 또다시 새로운 고통을 마주하게 될 뿐입니다.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시 찾아오는 것에 불과하죠. 때문에 인생은 고통이며, 이 세계는 최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법은 크게 효과가 없습니다. 우선 이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히려 고통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하등 동물보다는 고등 동물이 고통을 더 많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이에 쇼펜하우어는 크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심미적 해탈입니다. 심미적 해탈이란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황홀감을 말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한데요. 우리가 하루종일 천재 작가의 명화만, 아름다운 영화와 소설만 감상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는 두 번째 대안으로 윤리적 해탈을 제시합니다. 윤리적 해탈이란 고통의 원인인 의지 자체를 억제함으로써 누리는 영속적인 해탈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이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때에만 우린 무아경이나 황홀경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죠. 


쇼펜하우어의 이런 독특한 철학 체계는 당시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한 인도 철학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서재에는 칸트의 상반신 초상화와 청동불상이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두 사상에 대한 단순한 관심을 넘어 실제 자신의 철학에도 상당 부분을 이식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오랜 기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 등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여러사건들을 겪으며 그의 이론 또한 함께 주목받기 시작했죠. 주류에 편승하기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체계를 세우려던 그의 노력이 인정 받게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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