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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Jul 25. 2020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읽기

철학유치원 원전 읽기

칸트는 인식론과 윤리학은 물론 미학에 있어서도 근대적 관점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심미적 체험의 독특한 특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심미적 판단이 지닌 보편적 타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죠. 그는 자신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반성적 판단이란 우연한 사실로부터 새로운 보편자로 나아가는 판단을 말합니다. 그 반대에는 보편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특수한 사실로 나아가는 ‘규정적 판단’이 존재하는데요. 이는 개념, 원리, 모델, 표 등 먼저 주어져 있는 보편자를 통해 사실이나 개체 같은 특수자를 규정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판단을 업으로 삼는 대표적인 직업으로 판사를 들 수 있습니다. 판사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법을 잘 알아야 하며, 동시에 자신이 아는 법률적 지식을 근거로 소송에 올라온 특수한 사안을 판정해야 하죠. 우리는 이를 규정적 판단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때때로 판사는 기존의 법률적 상식으로는 판정하기 어려운 사건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법률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법률의 전제부터 다시 돌아보게 되는 건데요. 이때 판사는 섣부른 판정을 자제하고 도대체 법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등을 묻는 반성적 상황에 빠지게 되죠. 그리고 이 상황은 그 사안에 부합하는 원리나 개념을 발견할 때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기존의 원리에 완강히 저항하는 개별자의 주위를 맴돌며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원리를 모색하는 판단을 우리는 ‘반성적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칸트가 아름다움을 말하며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을 꺼내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칸트가 기존의 원리로 쉽게 재단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미학에 있어 가장 큰 아름다움은 ‘통념을 깨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기존의 문법을 깨뜨리고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법을 창조해 내는 것이며, 끊임 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설명할 새로운 원리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심미적 체험은 규정적 판단보다는 반성적 판단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죠.


칸트는 심미적 판단의 주요 특징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질’입니다. 심미적 판단에 수반되는 쾌감을 가리키며, 칸트는 이를 ‘무관심한 만족감’이라 부르죠. 무관심한 만족감은 인식능력들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 속에서 영혼이 느끼게 되는 생동감입니다. 선악이나 진위의 구별, 유용성 등에 대한 관심이 모두 배제되어 있으며, 정신과 신체의 통일체로서 향유하는 제3의 쾌감이죠.


두 번째는 ‘관계’입니다. 심미적 판단의 대상에서 성립하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가리키며, 칸트는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부르죠. 가령 여름날의 꽃밭을 생각해 보죠. 꽃밭에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색과 향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어떤 활력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죠. 사람들은 그 조화로운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구심점이나 의도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조화로움은 찾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신비의 장막 속으로 숨어들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양’과 ‘양태’입니다. 각각의 심미적 판단이 지니는 보편적 타당성을 가리키는데요. 칸트는 이를 통해 이론적 보편성이나 윤리적 보편성과 구별되는 심미적 보편성이 있음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보편성을 양의 계기에서는 ‘개념 없는 보편성’으로, 양태의 계기에서는 ‘개념 없는 필연성’으로 명명합니다.


칸트의 미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숭고’의 체험이 가지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죠. 칸트는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


고 말합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포착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크기에 대한 체험, 그것이 바로 숭고의 체험이라는 것이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우주, 마치 온 세상을 삼킬 것처럼 폭풍우 치는 바다를 보며 우리는 숭고를 경험합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속 방랑자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숭고의 감정이 아닐까 싶네요.


숭고의 체험은 불쾌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숭고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거대함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무의미를 경험함으로써 불쾌감에 빠져드는 건데요.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토대로 이를 어떤 신성한 것의 간접적 현시, 무한한 도덕적 사명의 암시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식능력들은 자신의 잠재력으로 돌아가 다시 일어서게 되죠. 조화의 논리에 한정된 아름다움의 미학과 달리, 부조화와 추함, 죽음, 무의미 등를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칸트의 숭고의 미학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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