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밥을 굶다
철학의 식탁 열 일곱 번째 이야기
내가 왜 좋냐, 는 상투적인 물음에 누군가가 했던 대답을 종종 떠올린다. “넌 적어도 날 밥 굶길 것 같지 않아.” “그게 이유야?” “응.” “에이...” 그때는 그 대답이 정말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니, 서운했던 건지도. 그때 그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답이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찬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뒤부터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먹고 산다는 것의 무게를 알게 된 즈음이지 아마. 그때나, 그걸 깨달았을 즈음이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워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며칠은 안 감은 듯 부스스한 머리와 너저분한 옷, 24시간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까지. 우리 상상 속의 철학자들에게 밥 굶기는 일상인지 모르지만 대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나 경영 지식이 있었냐면,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럼 이유가 뭐였냐고? 뭐긴 뭐야, 태어나면서부터 돈이 많았던 게지. 철학계에는 온통 금수저 투성이다. 플라톤은 정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왕의 주치의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버지는 법무장관이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철강왕’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단다. 예나 지금이나 사색에는 돈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모든 철학자가 다 부자에 귀족에 왕족이었을리 만무하다. 어디에나 다 예외는 존재하게 마련이니까.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이런 인물 중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따지자면 그는 흙수저 중 흙수저였다. 어머니는 루소를 낳은 뒤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루소 또한 어머니를 닮아 평생 요폐증을 가지고 살아갔단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루소가 10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어느 프랑스군 퇴역 대위와 싸움을 벌여 고소를 당했던 것. 결국 그의 아버지는 루소를 버린 채 황급히 고향을 떠나고 만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가까스로 철학자가 된 뒤에도 루소의 사정은 썩 나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활고로 인해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고,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니 말이다. 아이도 모두 잃어버린 무능한 아버지, 가정교사 시절 말 안 듣는 아이를 견디지 못한 무능한 교사. 사람들이 교육철학계의 필독서, <에밀>을 쓴 루소를 일컫는 말이었다.
공산주의의 대부 마르크스도 가난한 철학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마르크스도 여러 면에서 루소와 비슷했다. 특히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굶겼다는 점에서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는 정권의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다. 모국 독일에서 <라인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급히 정권의 핍박을 피해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다시 벨기에로 도망해야 했다. 이후 다시 독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돌아온 것은 실패뿐. 영국 런던으로 떠난 그는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망명의 횟수만큼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도 가난해져갔다. 가구와 옷을 저당잡히는가 하면, 막내딸이 죽었을 때는 관을 짤 돈도 없었을 정도였다니 가족들 입장에선 할많하않이었을 게다.
결국 마르크스의 선택은 친구의 피를 빨아먹는 거였다. 거머리의 숙주가 된 존재는 <공산당혁명>과 <자본론>의 공동저자인 엥겔스. 그는 저널리스트가 되겠다는 야망도 포기하고 친구를 도왔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직물회사 ‘에르멘&엥겔스’에 취직했고, 20여 년간 자리를 지키며 (심지어 때때로 횡령까지 저질렀단다) 마르크스의 생활을 부조했다.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루소와 마르크스, 그리고 엥겔스 모두 이런 상황을 부끄러워하거나 이를 핑계로 적당히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신의 과오를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아무튼 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해가 덜 되는 교육이 고아원 교육임을 알았기에 그곳에 보냈다. 다시 그런 경우가 닥친다 해도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횡령을 이렇게 자랑했다지 아마. “다행히도 작년에는 아버지가 벌인 사업에서 생긴 이윤의 반을 먹어치웠다네!” 물론 이게 ‘철학적’ 태도인지, 그리고 정말 이런 뻔뻔함(?)이 철학자가 지녀야 할 자질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나름이다.
밥, 그러니까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또 중요한 문제다. 당신은 어떻게 오늘 하루의 식사를 해결했는가? 한 끼 거한 상차림으로, 아니면 편의점에서 산 2+1 라면과 천 원짜리 삼각김밥으로. 그 밥값은 어떻게 당신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밤낮 없이 열심으로 일한 보상으로, 아니면 함께 하는 가족 혹은 누군가의 손길로. 당신에게 오늘의 밥 한 끼는 어떤 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