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와 쇼펜하우어
Director : 팀 블레이크 넬슨
Cast : 샘 워터스톤,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레첸 몰, 글렌 클로즈, 코리 스톨, 팀 블레이크 넬슨 외Philosopher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Lines : “생각해봐요. 고통 받으며 사느니 살지 않는 게 낫죠. 그런데도 에로스에게 홀려 헛된 욕망을 갈구하다가 번식시키고 말죠.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 어찌 보면 사악한 행위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형편없는 세상에 자식을 내맡기잖아요.”
“쇼펜하우어의 성적 불화에 대해 떠들어댔지. 내 나이에 쇼펜하우어는 푸들이랑 살았어. 그는 결혼이란 뱀자루에 손을 놓고 뱀장어를 찾는 거라고 했어. 존경하는 사상가들이 나와는 딴판으로 살았지.”
여기 날선 세계로부터 제 여린 마음을 베인 청춘이 있다. 이름은 소피. 그녀는 궁금하다. “세상은 왜 그리 비열하죠? 왜 그렇게 무심할까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죠?” 돈에만 집착하고 통장 잔고에 울고 웃는 자본주의 세상. 그 정점에 선 공간 뉴욕에서 그녀는 끝내 실망하고 자해한다. 그녀는 외친다.
“나는 이 세상에 맞지 않아(I’m not for this world)”
라고 말이다.
굳이 청춘이 아니더라도, 철학적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실망하고 마음 베일 것 투성이다.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옴니버스 형식이라 주인공이 많다) 아담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깐깐하고 완벽한 아내는 난소암에 걸렸다. 물론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다. 중2병에 빠져 대마초를 피우고, 각자의 연애에 좌충우돌한다.
샘과 사라의 부부관계는 곧 끝을 맺을 것처럼 위태하다. 샘은 젊은 시절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이를 낳고 결혼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을 후회(고백의 대상이 바람 피우는 상대라는 점에서 그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알기 어렵긴 하다)한다. 사라는 그 반작용으로 낮이면 두 아이를 교육하고, 밤이면 술에 취하는 생활에만 열중한다. 물론 그 분주함이 그녀의 공허함을 채워줄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대학에 다닐 즈음, 누구나 한 번쯤 치열하게 고민했을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대부분의 ‘사회인’에게 잊혀진지 오래다. 영원할줄 알았던 그 질문을 우리는 왜 잊고 살아가게 되었는가.
인생은 고통, 세계는 최악
그리고 이런 삭막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 34년동안 철학을 가르쳐 온 인물이 있다. 바로 월터 교수다. 오랫동안 존경받아온 철학자인 그에게도 삶은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다. 이렇게 살아야 할 바에는 살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 그런데도 인간은 “에로스에게 홀려 헛된 욕망을 갈구하다가 번식까지” 저지른다. “형편없는 세상에 자식을 내맡기는 잔인한 짓”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언급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한탄도 이런 어리석음과 맞닿아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이 ‘의지’에 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의지란 충동과 욕망 등을 의미하는 말.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성과 합리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지가 마치 볼 수는 있지만 몸이 불구인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힘센 장님과 같다고 여겼다. 어깨 위의 사람, 즉 이성이 지시하면 의지는 힘껏 달려 나간다. 이성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뿐, 실질적인 행동과 추진은 의지의 몫이다.
세상의 다양한 의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생식 본능(아아, 형편 없는 세상에 자식을 내맡기는 잔인한 인간이여!)’이다. 우리가 가장 고상하다고 여기는 사랑의 감정은 사실 종족 보존을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이 하얀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이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금물!) 또한 종족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결점을 보완하려는 무의식적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의지의 ‘무한함’에 반해 충족은 늘 부족하며,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욕망에 ‘충족’이란 없다. 설령 충족감을 느끼더라도 일시적이며 한정된 것일뿐이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간신히 벗어났다 싶으면 또다시 새로운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쾌락과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시 찾아오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인생은 고통이며, 이 세계는 최악이다.
금욕, 성적 불화 끝에 찾은 철학자의 해답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법은 크게 효과가 없다. 우선 이를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히려 고통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하등 동물보다는 고등 동물이 고통을 더 많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첫 번째는 심미적 해탈.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황홀감을 말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하루종일 아름다운 영화나 소설만 감상하며 살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대안은 두 번째 ‘윤리적 해탈’에서 찾을 수 있다. 윤리적 해탈이란 고통의 원인인 의지 자체를 억제함으로써 누리는 영속적인 해탈의 경지를 의미한다. 그는 인간이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에만 무아경이나 황홀경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영화가 끝날 무렵, 이야기는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34년간 이어진 강의를 마무리한 날, 월터 교수는 한결같다. 히스패닉 꽃가게 주인에게 다정하며, 배고픈 흑인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 두려움에 떠는 소녀를 돕기 위해 용기낸다.
뜻하지 않게 다가온 죽음의 순간, 그는 철학자 몽테뉴의 말을 되뇌인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
라며 말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의 순간이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주변의 슬픔조차, 그는 위로하고 보듬으려 한 것이다.
우리도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다시 하나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말이다. 영화 속에서 월터 교수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 않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와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더이상 소통할 수 없고,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그릇된 믿음’이라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외려 마음의 문을 열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도저히 소통이 불가하다는 그릇된 믿음이 만연한 시대에 여러분, 질문을 주저하는 이여! 마음의 빗장을 여세요. 서로 타인이 되지 맙시다. 서로에게 배운 것을 모른척 하지도 맙시다. 그게 더 중요하죠. 여러분의 전성기는 이제부터예요. 우리 모두 그러하길 빕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려 버둥대는 우리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 그통을 조금이나마 보듬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