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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Apr 01. 2019

플라톤, 이데아(idea)의 라면을 끓이다

철학의 식탁 두 번째 이야기

내가 비로소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게 된 것은 군복무를 하던 시절 처음 맛본 어느 혁명적인 인스턴트 면요리 덕분이었다. 나가사키 짬뽕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당시 백색국물 또는 하얀국물 라면이라 불리며 꼬꼬면, 기스면 등과 함께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마음껏 움직일 자유도, 새로운 물건을 살 방법도 없었던 우리는 몇날 며칠을 선임하사 옆에서 치근덕댄 끝에 나가사키 짬뽕 몇 봉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쫄깃한 면발은 물론이거니와 시원한 국물, 게다가 큼직한 해물 건더기까지! 녀석을 접한 그곳이 ‘싸제(사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군대에선 이렇게 부른다)’ 음식은 다 맛있게 느껴진다는 군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 맛은 가히 감동이었다. 후루룩 쩝쩝. 그렇게 정신없이 면과 국물을 넘기고 조금씩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즈음, 뜬금없는 고민 하나가 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근데 이 시키, 라면이야 짬뽕이야?’


나가사키 짬뽕, 라면일까 짬뽕일까?

논란의 여지는 많았다. 재빨리 이 녀석이 짬뽕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좌뇌는 이름 말미에 붙은 ‘짬뽕’이라는 두 글자와 기존의 라면과는 차별화된 국물 색깔에 주목했다. 반면 라면이 확실하다고 주장한 우뇌는 그럼 먼저 나온 ‘오징어 짬뽕도 짬뽕이냐, 게다가 자기들도 백색 국물 라면이라고 했지 짬뽕이라고 말한 적 없지 않냐’며 좌뇌의 주장을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결국 결정권은 심신 전반의 의견을 종합한 나의 몫.


“음…이유는 모르겠고…이거 그냥 라면 맞는데?!”


나뿐만 아니라 그날 함께 나가사키 짬뽕을 먹은 부대원 모두 우리가 방금 먹은 ‘그것’이 짬뽕 아닌 라면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 사실 고민할 필요도 명확한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 가슴 속의 무언가를 통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 마치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지만 무대 앞에 나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며 괴성을 지르고야 마는 어느 국군장병의 모습처럼 말이다.


나가사키 짬뽕이 결코 짬뽕이 아닌 이유

플라톤은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국가》를 통해 우리가 나가사키 짬뽕을 라면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낸다. 그의 대표적 세계관인 ‘이데아론’을 통해서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라면이 존재한다. 신라면, 삼양라면, 안성탕면 등등. 이데아란 말하자면 이런 모든 라면들을 라면이라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라면들은 생김새나 맛, 조리법 등에서 차이를 가지지만 라면이라고 불릴만한 무언가를 공유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이상적인 라면, 즉 라면 ‘이데아’다. 만약, 라면의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많은 라면들이 다 ‘라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즉, 라면의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하얀 국물의 라면과 빨간 국물의 라면이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라면들은 이데아 라면의 불완전한 복사물일 뿐이다.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가 든 예를 하나 더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먼저 동굴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곳에 갇힌 사람들은 사슬에 묶이고 머리가 고정된 탓에 평생 동굴의 벽면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길이 하나 있어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과 동물 모형의 그림자가 벽면에 드리워지게 된다. 물론 길을 걷다 출출함을 느낀 몇몇 사람 덕분에 가끔은 라면 그림자도 비쳤을 게다(못 믿겠다면 그 길 한 켠에 편의점이라도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탓에 이들은 자신이 평생 보아온 라면의 그림자를 진짜 라면의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풀려나 동굴 반대편을 향하게 된다. 처음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조금씩 환한 빛에 적응하기 시작할 게다. 그는 곧 태양빛으로 가득한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자신이 평생 라면이라 믿었던 것은 고작 라면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더 이상 어둠에 익숙하지 않다. 이전처럼 그림자들을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워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동굴의 벽면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가 불쌍하기만 할 것이다. 동굴 밖을 다녀온 뒤로 시력이 떨어진데다 라면(의 그림자)을 보고도 군침조차 흘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진짜 라면을 보았다고 큰 소리 쳐도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의 친구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라면의 그림자에 만족한 채 평생을 살아갈 뿐이다.


그는 대체 왜 이데아를 말했을까?

사실 플라톤이 고작 라면의 실체 하나 밝히려고 끙끙대며 그 두꺼운 책들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세상이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개인이 보다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인간으로 바뀌어가길 바랐다.


그가 생각한 이데아는 영원하며 불변성을 지닌 세계이다. 이데아론은 구체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정의(正義), 선(善)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도 적용되며, 특히 선의 이데아는 궁극적인 이데아이자 모든 철학적 탐구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선의 이데아는 태양의 비유로 설명된다. 플라톤은 태양이 우리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또한 성장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선의 이데아 또한 마음의 눈을 통해 실재의 본성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설명한다. 만약 선의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지도 모른다. 즉, 선의 빛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었으며, 죽은 뒤에도 그곳에 돌아가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이데아에 대한 선천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라면을 보더라도 “이것은 라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라면의 이데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완전한 현실의 세계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이성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이데아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데아를 발견해 세상의 본질과 진리를 이해한 자가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그림자 쫓기에 바쁠 테지만 말이다.


라면 먹는 플라톤

여담이지만 플라톤이 지금 시대에 산다면 아마 그도 라면을 즐겨먹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 근거는 그의 삶과 저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당대 그리스에서는 평범한 음식이었던 올리브와 말린 무화과를 즐겨먹었다는 그는, 요리기술은 “기쁨이나 쾌락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경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플라톤은 먹고 마심으로써 생겨나는 기쁨조차도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특히 쾌락과 즐거움은 육체 혹은 정신적인 공허함을 채움으로써 생겨난다고 설명했는데, 정신적인 음식이 ‘더 수준 높은 현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학문의 영원하고 진정한 본질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음식과 음료를 비롯하여 육체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탐내는 부분’을 ‘머리를 쓰는 부분’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배꼽 주위에 위치시킨 것 또한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보자면 부담 없고 간편한(게다가 맛있기까지 한) 라면은 그의 선호식품 1순위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세상에 그의 철학을 만족할 만큼 완벽한 음식이 라면 말고 또 있을까! 물론, 그가 죽은 지 25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라면이 세상에 등장한 탓에 그가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확인할 길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완벽한 라면은 가능할까? 

그럼 완벽한 라면, 즉 이데아 세계의 라면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대답은 ‘없다’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기 전까진 이데아의 세계에 발끝조차 닿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단, 플라톤의 설명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는 이데아의 세계에 닿을 수도 있다고 하니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만큼 놀라운 라면 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라면만 먹는’ 철학자가 될 각오부터 해야 할 게다. 그게 싫다면? 과감히 이데아 속 라면은 포기하자. 원래 사람이 원하는 걸 모두 갖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는 법이다. 게다가 너무 아쉬워하진 않아도 되지 싶다. 우리 앞에 놓인 라면도 충분히 완벽하며 맛있는 건 마찬가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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