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식탁 아홉 번째 이야기
요리를 하다 보면 매번 같은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더 넣어야 되나? 아냐, 벌써 세 숟갈 넣었으니 충분해. 혹시 싱거우면 어쩌지, 눈 딱 감고 반 숟갈만 더 넣어볼까?’ 바로 소금과 설탕, 간장, 고춧가루 등 요리에 들어갈 각종 양념의 양을 가늠할 때 말이다.
이 중차대하며 영영 그치지 않을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이면, 제발 뭐라도 기준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지난번에 어떻게 했었더라 하며 고민을 거듭하는 것이 사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내가 산 중닭은 단 한 번도 같은 크기와 무게의 중닭인 적이 없으며, 지난번에 사용한 진간장과 이번에 사용할 양조간장의 맛은 분명 다른 법인데 말이다.
과난사불급(過難詐不及) :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속이기 어렵더라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가 늘 되뇌어야 하는 말이 있으니 바로 ‘과난사불급(過難詐不及)’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의미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슬쩍 비튼 말인데, 한자 그대로 ‘(양념을) 넘치게 넣으면 모자라게 넣는 것보다 속이기 훨씬 어렵더라’는 얘기다. 우리가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요리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체로 간이 강하게 밴 음식보다는 싱거운 음식을 맛있게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냥 물 더 부으면 되는 거 아닌가’ 혹은 ‘재료 더 넣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은 이제 그만! 오늘 저녁상에 오를 고등어조림의 생선과 무에는 이미 속속들이 짠맛과 매운맛이 배어 있을 테니 말이다.
둘째, 간을 한 뒤 추가로 조리가 이뤄지는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즉, 재료 혹은 양념이 가진 맛이 좀 더 배어 나오거나 국물이 졸아들며 간이 변하는 시간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웰빙이니 몸짱이니 하며 제 한 몸 지키기에 모두가 목숨 거는 오늘날, 싱거운 음식은 몰라도 짠 음식은 대체로 용서받기가 어렵다. 특히 세상 모든 질병은 다 이겨낸 것만 같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아, 제가 조금 심심한 간을 즐겨요” 정도의 짧은 한국말 구사 능력 정도만 있다면 열에 아홉은 만사 오케이다.
뭐가 짜고 뭐가 싱거운 거더라?
하지만 이런 약삭빠른 팁도 한낱 미봉책에 불과할 뿐, 철학적 식탁이라는 우리 콘셉트에 맞게 간 맞추기에도 ‘좀 더 근본적인’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지 싶다. 주제는 ‘대체 무엇이 적당한 간이냐’는 것. 우선 조금만 생각해봐도 사람마다, 집집마다 간의 기준이 천차만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집 위층의 가족은 아주 매운 음식을 즐겼다. 아니, 단순히 맵다고 표현하기에도 설명할 만큼 아린 맛에 가까웠달까. 닭볶음탕이며 떡볶이의 속살까지도 새빨갛게 배인 매운맛은, 함께 음식을 먹을 때 콧등이며 목 뒷줄기로 땀 한 통쯤 쉽게 흐르도록 만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윗집 아주머니의 음식이 지나치게 맛있어 ‘고작’ 매운 걸로 포기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는 것. 새빨간 얼굴로 소름 끼치는 매운맛을 느끼고 있는 내게 아저씨는 늘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이 국물 좀 얹어서 먹어봐라. 그거 어디 싱거워서 먹겠니?”
중간 맛의 기준은 결코 같지 않다
자, 어디 그럼 저와 윗집의 매운맛 도식을 만들어보자. 당시의 맛을 완벽히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이런 식의 표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표를 통해 우리는 ‘중간 맛의 범위와 기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판단과 각각에 맞는 상황에 따라 나름의 중간 맛을 설정하게 된다. 즉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될지, 그 자리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자리인지 등에 따라 그 기준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상견례 자리에서 땀 뻘뻘 흘릴 정도의 매운맛 음식을 내놓았다고 쳐보자. 아마 평소 매운맛을 즐기지 않는 일가친척 중 누군가는 훗날 그 자리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고 기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선을 찾아
철학자 중에도 이런 ‘중간 맛’을 이야기 한 그리스인이 있다. 바로 서양철학 사상의 근간으로 평가받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며, 이는 더욱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즉, 목적과 수단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단과 목적의 도식'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어떤 것의 수단도 아닌 ‘목적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된다. 이 목적은 어떤 것의 수단도 아니며 그 자체로 선한 것이기에 ‘최고선’이라 불리게 된다.
그럼 대체 무엇이 최고선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최고선으로 꼽는 쾌락, 명예, 지식, 재산 네 가지를 후보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네 후보가 최고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쾌락'은 동물과 같이 그저 본능만을 따르는 존재의 목표다. 오히려 과도한 추구는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만들 뿐이다. '명예'는 항상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에게 더 큰 비중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명예는 언제든 남이 주기도, 빼앗기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선이 될 수 없다. 높은 인기를 얻다가 한순간에 비호감이 되어버린 연예인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모든 사람이 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선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최고선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산'은 항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최고선이라 말할 수 없다.
네 후보군에 대한 분석을 마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최고선이 곧 행복(eudamonia)'이란 주장을 펼친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행복 그 자체를 바랄 뿐이지, 결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수단으로서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행복은 결코 쾌락적이거나 무절제하지 않다. 무절제한 삶은 오히려 더 큰 고통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행복은 쾌락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데서 찾아오게 된다.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
그러나 중용이 무작정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중간을 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중용의 덕이 (1) 인간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부분에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것이며, (2) 수학적 평균으로서의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의 표현을 통해 중용의 개념을 알맞음, 마땅함, 적절함 등과 연결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사람들에 대해서, 마땅한 동기에 따라 마땅하게 행위 하는 것은 중간적인 최선의 일이며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윤리적인 덕으로서의 중용은 동물적 부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우리의 태도가 지나침 혹은 모자람 없이 적절하고 마땅한 방식을 유지함을 의미한다. 즉, 중용의 덕은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은 행위를 이끌어 낸다.
비겁함과 무모함의 사이에는 '용기'라는 중용이 있으며, 방탕과 무감각 사이에는 '절제'가 있다. 낭비와 인색함 사이에는 '관용'이 있고, 오만과 비굴함 사이에는 '긍지'가 존재한다. 또한 무기력과 지나친 분노 사이에는 '온화함'이 있으며, 아첨과 무관심 사이에는 '친애'가 위치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들은 일정하게 정해진 행위의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잘 조절되고 선택된 행위를 의미한다.
내 삶의 중용을 찾아서
생각해보면 요즘만큼 자신의 기준과 잣대, 목표 등이 무너져가는 시절도 없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하루가 다르게 크고 다양해지는 자극 때문에 나의 주관을 만들어가기도, 그 기준을 지켜나가기도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나름의 시사점을 던진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떠하며 그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기준을 잡아야 하는지를 살피고, 이를 통해 나름의 경계선을 긋는 작업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개념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사는 세상, 내 삶의 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 삶을 위한 나의 중용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은 고민하고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조그마한 고민과 결심, 실천만으로도 점차 변화해나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