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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Apr 03. 2019

에피쿠로스, 식탁 위의 행복을 조리다

철학의 식탁 네 번째 이야기

<카모메 식당>은 개봉 이후 우리나라에도 소위 ‘소울푸드’ 열풍을 일으킨 영화다. 영화는 시종일관 단순하고, 차분하다. 사치에라는 일본인 여성이 핀란드 헬싱키의 어느 길모퉁이에 식당을 연다. 이름은 카모메 식당. 한동안 손님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기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며 활기를 찾아간다. 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가를 묻는 일본만화 마니아,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오게 되었다는 미도리 등 카모메 식당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있는 음식과 함께 풀어가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한 장면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의 대표 메뉴가 오니기리,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주먹밥’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음식 중 왜 하필 주먹밥일까? 굳이 찾자면 일본 음식 중에서도 훨씬 화려하고 맛있는 것들을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궁금증에 사치에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는다.


"오니기리야 말로 일본인의 소울푸드이기 때문이에요. 일찍 어머니를 여윈 저는 가사 일을 도맡아야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꼭 1년에 2번 저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주먹밥은 자기가 만든 것 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것이 훨씬 더 맛있다고 하셨어요. 비록 아주 크고 볼품은 없었지만 그건 정말 너무나 맛있었죠."


사치에의 아버지가 1년에 2번 주먹밥을 식탁에 올렸다면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께선 겨울마다 양미리 조림을 식탁에 올리셨다. 바짝 다이어트에 성공한 꽁치처럼 생긴 양미리란 녀석은 타지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한 생선이지만 구워먹어도, 뼈째 튀겨먹어도, 탕을 끓여먹어도 진한 고소함을 내뿜는 별미 중의 별미. 특히 살짝 말린 것 한 두름을 간장양념에 조려 내면 겨우내 반찬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고마운 생선이기도 하다. 갓 지은 밥에 방금 조린 통통한 양미리 한 조각 얹어 입에 넣으면! 짬쪼롬하면서도 고소한 양미리와 따끈따끈 담백한 밥맛이 입 안 가득 어우러져 비싼 장어초밥 부럽지 않은 즐거움이 완성된달까.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

“나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하면, 선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당한 발언을 한 덕에 2500년 넘게 방탕한 쾌락주의자로 오해받고 있는 에피쿠로스도 사실은 이런 소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 더 가든(The Garden)으로 알려진 일종의 ‘정원 공동체’를 구성해 생활한 그는 ‘하루에 음식을 장만하는 데 1므나의 돈도 쓰지 않고, 포도주 4분의 1리터만으로도 만족하면서, 그나마 대부분은 물만 마시는 생활을 즐기며’ 산 사람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내려올 정도.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고 줄이는 방식을 통해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욕망을 크게 필수적인 욕망과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그리고 공허한 욕망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필수적인 욕망이란 의식주와 같이 생활의 기본적인 욕구를 말하며,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은 명품 옷이나 쓸데없이 큰 집에 대한 탐욕을, 공허한 욕망은 인기나 명예 등에 대한 욕심을 말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중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필수적인 욕망뿐이다. 많은 노력 없이 얻을 수 있고, 일단 한번 채워지기만 하면 더 이상 고통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과 우정에 대한 욕망 또한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욕망을 줄이고 소박한 삶을 성취한다면 잡념도 없고 동요도 없어 고요한 마음의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욕망의 절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마음의 평화, 즉 평온함이 삶의 목적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는 이를 위해 욕망의 절제는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생전 신을 노엽게 하면 죽고 나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존의 종교적 사유를 거부하여, 우리 모두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자신의 철학에 받아들인다. 즉, 우리의 몸과 영혼은 원자로 되어 있으니 사후에는 모두 분해되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에피쿠로스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종교를 멀리한다거나 쾌락을 긍정한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랜 시간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람들은 그가 음식과 포도주에 대한 지나친 탐욕 때문에 하루에 세 번이나 토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매춘부를 애인으로 삼았다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알려진 사실 그에게 배고픔을 달래는 일은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에 불과했으며, 매춘부가 공동체에 드나든 사실 역시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이 실현된 모습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유지된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 불필요한 제품을 구매하게 하고,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며,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강하게 자극해 더 많은 소비를 이끌어 내는 악순환을 조장한다. 누군가는 굶어죽는 가운데에도 생산되는 음식물의 절반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며, 무분별한 소비와 생산으로 벌어지는 각종 위기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욕망만 강요하는 시대에 선 우리에게 그의 철학은 ‘과연 무엇이 행복인가?’라는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행복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가 보기엔 ‘나’를 넘어 ‘우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현재’를 살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행복을 위한 충분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상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밤, 우리도 당장 그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다. 간이 알맞게 밴 양미리 몇 점 앞에 놓고 친구와 얼큰하게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여유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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