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식탁 열세 번째 이야기
초등학생 시절,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던 내가 (라는 말은 물론 거짓말인데..) 상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우리집의 공식적인 외식일이었다. 주로 가는 집은 동네 근처의 돼지갈비 가게나 돈까스 전문점 같은 곳이었지만, 종종 주말에 시간을 내어 아버지의 ‘맛집 리스트’를 탐방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다녔던 가게 중 많은 곳이 사라지거나, 자리를 옮겼거나, 알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예전의 맛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 하나만큼은 내가 어린 시절 먹었던 그맛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바로 평양냉면 전문점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을지면옥’이 그 주인공이다.
을지면옥이 위치한 을지로 일대에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의 평양냉면 전문점이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 가게로 알려진 ‘우래옥’이 있으며, 평양냉면 전문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의 뒤를 이어 둘째딸과 첫째딸이 각각 문을 연 ‘을지면옥’과 ‘필동면옥’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평양냉면은 ‘심심하다’는 말의 북한식 표현인 ‘슴슴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회 무침을 넣은 빨간 양념에 감자 또는 고구마 전분으로 뽑은 질긴 면을 넣어 비벼먹는 함흥냉면과 달리, 맑은 소고기 육수에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을 넣은 뒤 편육을 비롯한 간단한 고명이 올라간 것이 전부인 음식이니 말이다.
여러 평양냉면 전문점 중에서도 을지면옥의 냉면은 이런 ‘슴슴함’이 배가된 곳 중 하나이다. 고명이라곤 고기 몇 점과 얇게 썰어낸 파, 고춧가루가 전부이고, 애호가들이 그토록 외쳐대는 ‘육향’ 역시 그리 강하지 않은 축에 속하니 말이다.
하지만 면, 육수, 고명 중 어느 하나 튀지 않는 맛을 가진 덕분에 오히려 그 나름의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한다. 불필요하거나 과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만들어진 균형과 묘한 긴장감이 ‘완벽한’ 맛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랄까.
을지면옥을 갈 때면, 종종 나는 이 이론을 떠올린다. 바로 영국 오컴에서 태어난 중세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사제였던 윌리엄의 ‘오컴의 면도날’ 말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간단히 말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보다 간단한 주장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윌리엄은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 많은 것들을 필요 없이 가정해서는 안 된다.
둘. 더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할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워서는 안 된다.
윌리엄은 당시 지나치게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진 중세 철학과 신학의 논쟁 가운데서 무의미한 진술들을 배제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원칙을 세웠다. 그는 “쓸데 없는 다수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즉,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으며, 가정은 가능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원칙을 냉면에 적용해보자. 가장 좋은 냉면은 무엇일까? 아마도 불필요한 것은 모두 배제한 채 ‘꼭 필요한 것’만 남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과한 육수나 양념도, 질긴 면도, 심지어는 냉면의 필수품처럼 느껴지는 얼음도 없이 멋진 맛을 만들어내는 을지면옥의 냉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