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유치원 원전 읽기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 시골의 어느 오두막 앞에 마차를 세웠습니다. 바로 17세기의 철학자이자 수필가, 정치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 주인공이죠. 그가 마차를 세운 이유는 참을 수 없는 탐구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온도와 부패의 관계’를 연구 중이었는데요. 눈으로 고기의 부패가 얼마나 지연되는지 알아보고자 그 즉시 닭을 구해 죽이고 그 사체의 안팎을 눈으로 가득 채웠죠. 베이컨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게 된 것을 흡족해 했지만, 다시 마차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극심한 오한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실험을 핑계로 춥고 습한 야외에 오랜 시간 나가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1626년 4월 9일 아침, 베이컨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며칠 전 남긴 ‘실험은 성공적이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죠.
출세욕과 명예욕의 화신,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시대는 영국이 소위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해 나가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열강의 위협과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영국을 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데 이바지한 인물이었죠.
이 시기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발전해가는 시기였습니다. 인간 ‘이성’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토대로 자연을 정복해 나가면 보다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죠. 베이컨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년 11월만 되면 홍삼 엑기스에 붙어 나오는 그의 유명한 말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etentia)”는 사실 수능에 뭐가 출제될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자연’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죠. 그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차츰 인간 제국의 영토를 넓혀간다면 전래 없는 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자연을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구 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베이컨 이전 시대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연역적’인 방식으로 연구했습니다. 이는 이미 사실로 여겨지는 명제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얻어 내는 방식을 말하는데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예죠. 이 방식은 결론의 내용이 전제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식의 확장을 가져오기 힘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가득한 자연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방식이죠.
그렇다면 베이컨이 제시한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1620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노붐 오르가눔>을 통해 새로운 학문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귀납법’이었죠. 귀납법이란 개별 사례를 하나하나 정확하게 관찰하고 조사하여 가장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매우 보편적이지만, 그가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상당히 생소한 방식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의 지식을 성경이나 과거의 권위 있는 이론에 기대어 이끌어 내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이죠.
우상(idor)을 말한 자, 우상은 되지 못하였으니
베이컨은 이처럼 관찰이나 실험 없이 찾아낸 명제가 ‘우상(idor)’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상이란 우리가 참된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가리는 편견과 선입견을 일컫는 말인데요. 이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우선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종적 편견을 일컫습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의인화하여 설명하려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두 번째인 ‘동굴의 우상’은 개인적 주관과 선입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일컫습니다. 베이컨은 이를 ‘자기만의 동굴 안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표현했죠. 세 번째 ‘시장의 우상’은 언어 소통 문제로 생겨납니다.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면 존재도 불확실한 ‘엄친아’가 생겨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마지막 ‘극장의 우상’은 전통이나 권위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신뢰하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앞서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또다시 잘못된 이론과 결론이 도출된 사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죠.
베이컨은 이렇듯 자신이 제시한 방법론을 토대로 대영제국, 그리고 자신의 무궁한 영광을 꿈꿨습니다. 살아 생전에도, 자신의 죽음 후에도 영원한 위인으로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던 거죠.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의회와 영국 왕실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 그를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던 의회가 꼬투리를 잡은 겁니다. 죄목은 뇌물수수를 포함한 20여 건의 부패 혐의. 고위 관직에 오른 뒤 자신의 낭비벽을 감당하기 위해 일반인은 물론, 소송 당사자들에게까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죠.
결국 그는 모든 공직을 박탈 당하고 4만 파운드의 벌금형과 함께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정치에 뜻이 없음을 확인 받고 풀려나게 되었죠. 그는 이후 런던 근교에서 은둔하며 학문에만 전념합니다. 필생의 목표였던 6부작 ‘학문의 대혁신(Instauratio magna)’만큼은 완성시키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말이죠. 그럼에도 그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절반에 해당하는 3부작 만을 완성한 뒤, 세상을 떠난 겁니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앞선 세대의 권위와 편견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모습은 충분히 높게 평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믿음처럼, 이후 오랜 기간 인간 문명은 과학과 이성을 토대로 분명 꾸준히 발전하여 왔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