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유치원 원전 읽기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윤리학자인 피터싱어는 자신의 저서 <동물해방>을 통해 인간을 넘어 동물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생명 윤리를 말합니다. 이 책의 요지는 단순히 한 개체가 어떤 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일종의 편견이라는 겁니다. 그는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인종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부도덕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죠. 그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동물 평등권을 요구합니다.
피터싱어는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동물권의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동물 평등권 반대자들의 입장을 반박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연구를 위한 도구로써 동물이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동물실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며, 시간과 비용의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1922년 캐나다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밴팅은 동물실험을 통해, 스무 살을 넘긴 생존자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죽음의 병이었던 당뇨병의 치료제 인슐린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실험에 사용된 개는 90여 마리였지만, 그 희생으로 전 세계에서 3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죠.
피터싱어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지로 반박합니다. 우선 그는 동물들의 고통에 비해 대체적으로 얻어낸 결과가 하찮고, 뻔하며, 의미가 없는 것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던 바를,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 봐도 훨씬 덜 유해한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 내용을 과학적 특수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
동물 실험을 하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것이죠. 또한 그는 동물실험의 결과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리라 믿을 수 없으며, 동물 실험을 대체할 다양한 실험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가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공장식 사육으로 인한 동물권의 침해입니다. 우선 공장식 사육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어느 책의 한 구절을 읽어보죠.
돼지를 좁은 스톨에서 키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감금 틀에서 키우는 공장제 축산은 양계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돼지고기의 태반이 이런 곳에서 생산된다. 닭의 케이지와 마찬가지로 돼지의 스톨 사육도 좁은 공간에서 많이 키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돼지를 키우다 보면 당연히 돼지끼리 부딪히고 다치기 십상이다. 그러니 딱 한 마리씩만 들어갈 수 있는 철제 스톨을 만들어 가두어 키우는 것이다. 이런 돼지는 운동도 못하고 장난도 칠 수 없으며, 심지어 몸의 방향을 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먹고 싸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피터 싱어는 이와 같은 문제를 언급하며, 자연스런 행동을 방해할 정도로 동물을 심하게 감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최소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몸을 돌린다든가 털을 고를 수 있어야 한하며, 일어섰다 누웠다 하거나, 자신의 사지를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설령 공장식 축산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개혁 중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큰 변화는 없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종차별주의에 대해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는 첫 번째 단계로 동물을 더 이상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에 대한 연민을 느끼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대상을 먹는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죠. 그는 이를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단계는 생산지가 확실하지 않을 경우 닭과 칠면조, 토끼, 돼지, 송아지, 소, 그리고 달걀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2단계는 어떤 유형의 도축된 조류나 포유류도 먹지 않는 것이죠. 3단계는 물고기와 인간 모두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며, 4단계는 채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피터싱어는 현대인은 동물이 처한 상태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을 정도의 박애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자비한 착취를 용인하는 근본적인 입장을 바꾸지 않은 채 이루어진 개선은 언제나 침식당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죠. 그는 인간의 손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일단 인간이 착수하기만 하면 비교적 해결이 용이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보단,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죠.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대부터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과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채식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며, 건강 유지를 위해서라도 일정 이상의 육식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 반대편에선 이 역시 육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간들의 이기적인 변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 이후 동물권의 보장에 관한 많은 논의와 공감이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럽에서는 2013년에 스톨 사육이 금지되었으며, 동물실험을 중단하는 업체 또한 속속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죠. 우리는 언제 진정한 동물해방을 말할 수 있을까요? 어느 범위까지를 우리는 동물해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