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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Dec 27. 2019

중국의 반일운동이 조선인의 밀수로 이어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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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정확히 표현하면 밀무역은 언제, 어디서나 금지되어 왔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국과의 통상을 무조건 허용한 예는 없기 때문이죠.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밀무역 통제를 위해 세관을 설치하고, 물품이나 선박이 반드시 허가를 받아 출입하도록 엄중히 단속합니다.



그렇다면 밀무역은 왜 일어날까요? 우선 해당 상품의 시세 차이가 크거나 관세율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수출입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밀수출하는 나라의 입장에서는 변칙이긴 해도 이 또한 자국 제품의 수출이기 때문에 이를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의 제품이 몰래 들어오는 것은 철저히 막지만, 내 제품이 나가는 것은 슬쩍 눈감아 준다는 거죠. 무기, 마약 등의 밀무역도 막대한 이윤을 이유로 늘 성행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불법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밀수가 존재하는 이유죠.


국가와 권력이 시기별, 품목별로 ‘무엇을 불법무역으로 판단하는지 살펴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1799년 중국이 아편수입을 금지시켰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조차 소비가 불법인 아편을 합법적 무역으로 가장해서 밀수출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기에는 일본과의 정상적인 무역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국내 생산품 보충을 명목으로 상호묵인하에 밀무역이 이뤄졌죠.


1929~1932년 대규모·조직적 밀수가 발생한 배경

그렇다면 식민지 시기의 조선과 중국, 일본은 어땠을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제1, 2차 산동출병과 제남사건, 장작림 폭살사건으로 반일운동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번져나갔죠. 기존 중국의 일본수입품 관세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지만 국민정부 좌파계열과 각지의 중국인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일본 상품에 대한 ‘구국기금’ 부과가 이뤄졌습니다. 그 기금은 면제품의 20%, 도자기·해산물·견제품의 30%, 사치품·잡화의 70%에 달했죠.


게다가 이후 중국이 각국과 관세협정을 맺으면서, 일본 또한 열강의 압박에 못 이겨 중국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함에 따라 수출 상품의 관세율이 치솟게 되었습니다. 조선을 통과해 무역이 이뤄지는 일본상품과 조선상품 또한 일본 상품과 동일한 관세율을 적용받았습니다. 이는 결국 조선의 대중국 무역위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죠.


밀무역의 핵심 지역, 신의주

만주국 수립이전까지 식민지 조선의 대외무역은 대부분 대중국 무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중국 수출의 60%가 육로, 40%가 수로를 통해 이뤄졌죠. 육로 무역은 전부 신의주를 통과했고, 수로는 약 90%가 신의주를 경유했죠. 거의 대부분의 물자가 신의주를 거쳐간 겁니다. 때문에 신의주에는 ‘육접국경특혜’라는 감세 특혜가 존재했는데요. 그러나 이마저도 1930년 폐지되며 수출액이 전년대비 32% 격감하는 상황을 맞이했죠.



이런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밀무역이었습니다. 관세율이 높아진게 문제이니, 관세만 해결한다면 수출이 원활해지고 가격 경쟁도 쉬워질테니 말이죠. 물론 밀수출에 따르는 위험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때문에 밀수출을 할 때는 늘 권력의 비호가 필요했는데요. 당시 안동은 부속지(일본행정권, 일종의 조계지와 비슷), 안동영사관(행정권), 안동일본경찰서(치안권)의 묵인 혹은 비호 아래에서 대규모·조직적인 밀수출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공권력이 눈감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1930년대 초반 신의주에서 안동으로 ‘수로 수출’되는 물품 중 90%가 밀수출품에 해당하게 됩니다.


주요 밀수품목은?

그렇다면 당시 밀수출되던 품목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중국 안동해관관리의 밀수현황 일기보고서를 보면 대략적인 품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잡화품과 술, 면포, 귤, 설탕 등이 많았으며, 이중 잡화는 메리야스, 셔츠, 장갑, 양말, 면수건, 성냥, 전구 등의 생필품과 고무신 등의 신발류가 대부분이었죠. 이들 무게가 가볍고 부피가 크지 않아 밀수출이 용이한 상품들이었습니다.


밀수단속, 방관과 협조 사이

조선에서 중국으로의 밀수출이 빈번해지는 만큼 중국해관과 밀수업자간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야간에 신의주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모두 밀수 단속으로 인한 소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결국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30년 5월 17일, 고무신 10상자의 밀수출을 시도하던 조선인 2명이 중국 측 배와 충돌하며 익사한 것이죠. 그러자 이에 분노한 조선인들은 중국해관감시소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손시켰습니다. 충돌은 이어졌습니다. 1931년 10월 1일 중국해관리가 조선인 밀수출업자의 손목을 구타하자 조선인들이 중국해관리를 집단으로 보복 폭행했고, 10월 22일에는 조선인이 중국해관리에게 투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죠.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조선인이 빼앗긴 밀수출품을 탈환하기 위해 중국해관감시소를 습격하고, 관리를 감시소에 감금하고 협박하는 상황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밀수업자와 중국해관의 지속적인 충돌과 중국에서의 ‘배일, 배선 운동’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기존법령으로 밀수출단속의 근거가 충분히 있고, 단속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 스스로 “수출업자에게 불편을 입힌다”거나 “밀수출을 하는 자에게 비난을 받는다” 등의 답변을 한 것을 비춰 보았을 때 이는 명목상 답변에 불과할 뿐, 밀수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고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만주국 수립, 일본의 엔블록 형성 이후 밀수의 추이

하지만 밀수 시장은 만주국 수립 이후 급격히 위축됩니다. 만주가 일본경제권으로 들어가면서 ‘엔블록’이라는 경제체제를 만들어 나갔기 때문이죠. 조선 측에서 만주국으로 밀수를 하면 기존의 중국 해관이 입던 피해를 고스란히 일본 경제가 입는 모양새가 되었던 건데요. 따라서 밀수단속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밀수의 전선이 화북지역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하지만 1937년까지도 신의주는 여전히 ‘밀수왕국’이라는 악명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통제경제 이후 지역 간 물가차이가 심화 되면서 금, 생필품 등의 밀수가 활발히 일어났던 거죠. 또한 신의주부의 토목공사가 중지되면 토목인부들이 밀수출에 종사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신의주 지역의 밀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국영기업의 물자공급이 신의주-안동 루트를 통해 몰래 이뤄진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죠. 해방 이후의 북한의 밀수문제까지 영역을 확장한 폭넓은 분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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