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린느 쥐스낀느의 단편 소설 <문학적 건망증>은 '읽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를 다룬다.
별 특별한 상태가 아니다. 암기형 시험을 치러 본 모든 사람이 안다.
문제를 틀리길 원해서 까먹은 게 아니다. '까먹음 당한' 것이다. 대부분의 망각은 수동적이다.
'망각'이라는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는 '좋은 읽기'다.
읽기의 목적은 '잃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정이 다르다. 좋은 읽기는 '잃기'를 능동적으로 지향한다.
능동적으로 행하는 '읽은 후 잃기'는 모든 읽기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며, 읽는 사람과 텍스트의 아주 특별한 조우에만 가능하다.
이 우연한 만남이 달성되었다는 전제하에, 두 가지 반대 방향의 방식으로 좋은 읽기에 도달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폭풍우 앞의 난간이다. 누구든 나를 잡고 싶으면 잡아도 좋다! 그러나 나 너희들을 위한 지팡이는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읽은 후 잃기'에선 텍스트를 난간으로 삼는 방법과 지팡이로 만드는 방법이 모두 좋다.
텍스트를 지팡이로 삼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를 유동화하는 것이다. 즉 읽는 자의 고정된 문자열로 텍스트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벤야민의 천문학자 예시를 생각하면 된다. '별들의 위치'에 불과한 텍스트에서 '별자리'라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별들의 위치' 그 자체, 각 별들의 고정점을 망각하고 '오리온자리'라는 새로운 의미를 도입하는 행위다.
다른 하나는 텍스트를 난간으로 삼는 방법으로, 텍스트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절대적 타자로서의 문자에 완전히 복종함으로써 '읽는 자'라는 주체를 형해화한다. 읽는 자 안에 있는 언어를 비우기 위해 타자의 기표를 지렛대로 삼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루터의 성서읽기에 대해 말한 바를 생각하면 된다. 루터는 성서의 문자에 완전히 복종하였기때문에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언어들을 '잃어버렸고' 기성 교회의 언어들을 '망각시키기 위한' 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기표에 대한 맹신을 바탕으로 한 주체잃기의 모습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앞뒷면이다. 고정점을 '읽는 자'에 둘 것인가 '읽는 대상(텍스트)'에 둘 것인가의 차이다. 둘 중 하나는 신탁을 주는 신이 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바치는 제물이 된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읽기'를 '읽는 자'와 '읽는 대상'의 양자관계로만 국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고정점은 '타자의 언어', 즉 외부에 존재하게 되거나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되므로 양자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좋은 읽기는 마치 무중력을 전제한 실험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독자와 특별한 텍스트의 운명적 만남을 전제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읽기의 우주는 사랑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