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의 결혼식 - MSN과 초록창 사이에서 고백이 머물렀다
“이모, 그 스팸 메일 말이야. 그 이후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조카의 눈빛이 반짝이며 내 얼굴을 비췄다.
김무성의 메일 이야기를 꺼내 놓은 지 일주일,
그녀는 여전히 ‘스팸함’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붙들렸다.
“있었지. 그 후로도 나는 자꾸 스팸함을 열어보게 됐어.
거긴 마치… 읽히지 못한 감정들이 모여 있는 작은 무덤 같았거든.”
조카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덤이라니, 너무 무서워. 그럼 그 안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랑이 있다는 뜻이야?”
나는 웃었다.
“살아 있다기보다… 아직 삭제되지 못한 마음에 가깝지.”
세상은 빠르게 환승 중이었다.
메일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서 ‘띠링!’ 하고 불이 켜졌다.
그 한 번의 알림음에 심장이 먼저 반응하던 시절.
‘OO님이 로그인했습니다.’
그 문장은 그때의 “안녕”이었다.
창이 켜지고 커서가 깜빡였다.
“안녕, 오늘도 연구실 잘 갔어?”
그의 인사는 늘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이 내 하루의 호흡을 다시 맞춰주곤 했다.
90년대의 겨울,
우리는 비디오방에서 시작된 아주 느린 관계였다.
지금은 ‘썸’이라 부르겠지만,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오가는 기류를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냥 서로를 ‘좋은 친구’라 불렀다.
좋아한다는 말 대신 “오늘 영화 재밌었지?”
그 한마디면 충분하던 시절.
그는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삐삐로 남긴 마지막 메시지.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잘 지내.”
나는 너무 늦게 그 음성을 확인했다.
그가 떠난 뒤였다.
그날의 공기와 목소리는, 하필이면 ‘지연 통보’처럼 뒤늦게 도착했다.
우리의 끝은 그렇게 조용했다.
그런데 새천년이 밝은 어느 날,
MSN 친구 목록에 낯익은 이름이 떴다.
‘OOO486@hanmail.net’
손끝이 떨렸다.
화면 속 그 이름 하나가,
마치 오래된 음악처럼 나를 데려갔다.
지퍼를 반쯤 내린 빈폴 티셔츠,
비디오방 조명 아래 어색하게 웃던 얼굴,
모든 게 한순간에 복원되었다.
그와 나는 다시 말을 섞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그 인사는 너무 평범했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는 비디오방의 두 시간짜리 추억을
메신저 대화창으로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프라인에서는 만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는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유학 이야기, 내 연구실의 밤샘 일상,
MSN 창 안에는 비밀이 없었다.
그는 말끝마다 ‘ㅋㅋ’을 붙였고,
나는 점 세 개 ‘…’로 대답했다.
그 세 점 속에는,
아직 꺼내기엔 이른 마음이 묻어 있었다.
조용한 감정이 오갔다.
국경 너머에서 보내온 메시지는
시차와 언어의 벽을 넘어
하나의 새로운 감정선을 만들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멀고,
우정이라 하기엔 너무 가까운
그 중간 어디쯤에서 떠 있는 관계.
가끔 생각한다.
그때 ‘썸’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 덜 어색하게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 말에 갇혀 더 쉽게 무너졌을까.
단어가 없던 시대라서
우리는 더 솔직했고,
그래서 더 오래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엔 스마트폰이 없었다.
문자도, 사진도, 지금처럼 손바닥 위에서 번개처럼 오가지 않았다.
누군가와 연결되려면
컴퓨터를 ‘켜야’ 했다.
연결은 습관이 아니라, 작은 의식(ritual)에 가까웠다.
집에 가기엔 애매한 시간,
나는 종종 PC방으로 달려갔다.
당시엔 ‘인터넷 강국’이란 말이
막 자부심처럼 퍼지던 시절이었으니까.
어둑한 공간에서 모니터 불빛만 반짝이던 밤,
‘띠링!’
그가 로그인하면,
심장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왔어?”
“응, 이제 막 컴퓨터 켰어.”
그 짧은 문장들이
그때의 우리를 다시 세상과 연결했다.
요즘엔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게 이어지지만,
그 시절의 연결은 매번 작은 기적이었다.
2000년대 초,
인터넷은 ‘사람을 찾는 기술’이었다.
이름, 학교, 생일, 몇 가지만 입력하면
잃어버린 인연이 화면 위로 걸어 나왔다.
MSN, 네이트온, 싸이월드.
모두 ‘친구 찾기’ 기능이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로그인할 누군가를
참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
조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다 연결돼 있어서,
그 간절함을 잘 몰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땐 연결이 곧 감정이었거든.
기술보다 마음이 더 빨리 반응하던 시절이었지.”
연구실의 밤엔 언제나 스탠드 불빛이 길게 누워 있었다.
졸업논문, 세미나, 커피.
그 반복 속에서 나를 유난히 챙기던 사람이 있었다.
“혜성 씨, 운전면허 땄죠?
첫 연습, 제 차로 해요.”
그는 연구실의 동기이자, 내게는 늘 ‘선배’였다.
이름 뒤엔 항상 ‘씨’를 붙였고,
내 코트를 먼저 챙겨 들던 사람이었다.
눈으로만 웃고,
말보다 배려가 앞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놀이공원 티켓이 생겼는데, 다 같이 가요.”
모두들 좋다며 약속을 잡았지만,
당일엔 하나둘 사정이 생겼다.
결국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었다.
“괜찮아요? 둘이 가도?”
“재밌겠네요. 회전목마 타요.”
에버랜드의 바람은 차가웠고,
차 안의 온도는 천천히 올랐다.
개장부터 해질 녘까지 우리는 자유이용권을 불태웠다.
비명과 웃음 속에서 연구실의 피로가 흩어졌다.
선배는 캐논 DSLR을 목에 걸고
회전목마 위의 나를 오래 찍었다.
그 렌즈 뒤의 시선엔
오래 숨겨둔 문장 하나가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조심스러운 떨림이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건 아마, 나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막 자라려는 순간,
우정이라는 단단한 벽이 그 앞을 막고 있었다.
2000년,
버스 외벽에 커다랗게 적힌 한 문장이 도시를 흔들었다.
‘선영아, 사랑해.’
모두가 진짜 ‘선영’을 찾았다.
남자들에겐 짝사랑의 대명사,
여자들에겐 자신의 이름이 ‘선영’이길 바라는 주문.
나중에야 그게 여성 커뮤니티 마이클럽(MyClub)의
티저 광고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시절의 우리는 그 문장을 진짜 고백으로 믿었다.
버스, 전봇대, 지하철 광고판이
고백의 벽으로 변하던 시절.
도시는 패러디로 들끓었고,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랑을 외쳤다.
MSN 대화창에도 종종 툭 튀어나왔다.
“결혼할래?”
대부분은 장난처럼 던져졌지만,
진심은 언제나 그 뒤에 숨어 있었다.
겨울이 더 깊어가던 밤,
연구실 불을 끄고 나오자 선배가 말했다.
“혜성 씨, 잠깐만요. 벤치에서 이야기해요.”
자판기에서 막 뽑은 미지근한 커피 두 잔.
가로등 아래 벤치엔 얇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입김이 살짝 떨리며 흩어지고,
선배의 숨은 오늘따라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르게 들렸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종일 안 보이던데…“
그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종로 귀금속 거리 특유의 얇은 보라색 끈, 하얀 포장.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오늘 종로에 다녀왔어요. 이거… 사려고.”
“제 생일 지난 거 아시죠?”
내가 농담처럼 말하자, 그는 숨을 고르고 상자를 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화이트 골드 반지가 조용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는 가로등 아래, 한쪽 무릎을 천천히 바닥에 댔다.
“나랑… 결혼합시다.”
시간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술기운도, 과장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놀랄 만큼 단정했고,
말끝마다 오래 다듬은 문장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선배, 우리… 사귀지도 않았잖아요.”
내 목소리는 무심한 척했지만, 손 안의 컵은 뜨겁게 흔들렸다.
“꼭 사귀어야 결혼하나요?
우린 오래 봐 온 동지잖아요.
힘들 때 서로 버텨준 사람… 저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 오래 알고도 모른 척해 왔던 기류가
겨울 공기처럼 또렷해졌다.
에버랜드에서 내 사진을 찍던 그의 미묘한 미소,
새벽까지 남아 있던 날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라던 배려,
회의에서 내 편을 들어주고도 모른 척하던 조심스러움.
나는 그 모든 신호를 알면서도
우정의 이름으로 접어 넣어왔다.
그는 상자를 들고, 나는 종이컵을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과 우정이란 단어가
서로의 무릎 사이에서 토론을 벌이는 듯했다.
“선배, 저는… 친구로 남고 싶어요.”
조심스럽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 말은 내게도 차가웠다.
그러나 그 밤, 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을 세우며 상자를 덮었다.
‘딸깍’
겨울밤이 아주 얇게 갈라졌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연구실의 빈자리는 그의 자리부터 보였다.
의자 등받이에 남은 체온 같은 주름.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아프겠구나. 그리고… 나도.’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자상함을 오래 좋아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사랑으로 번역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나는 아마 같은 문장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 믿었고,
우정이 우리를 더 오래 지켜줄 거라 확신했으니까.
멀리서 연구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각자의 온도를 챙겨 일어섰다.
그는 반지를, 나는 아직 따뜻한 커피를.
그 밤의 결론은
로그인도 로그아웃도 아닌,
서로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저장’이었다.
몇 달 뒤, 메일함에 초대장이 도착했다.
제목: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문장은 담백했고, 날짜와 시간은 정확했다.
그는 선을 보고 빠르게 결혼을 결정했다.
그런 일은 그 시대에 그리 낯설지 않았다.
결혼식 날,
하얀 부케가 공중을 가르며 내 손으로 날아왔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그것을 받아들였다.
꽃잎의 떨림이 손끝으로 번졌다.
하얀 천장 조명이 반사되어 꽃잎이 물결처럼 번졌다.
“이모, 그거 사인 아니야? 아직 덜 끝난 인연이라는.”
조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야. 그냥… 예의일 뿐이지.”
나는 웃었지만,
그날 이후에도 손끝엔 오래도록 꽃의 촉감이 남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내 미니홈피 방명록에 비밀글을 남겼다는 걸 알았다.
첫 문장은 이랬다.
“고마웠어요. 늘 응원해요.”
스크롤을 내리려던 찰나,
손이 미끄러졌다.
폴더가 통째로 삭제됐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문장과 마음은 한꺼번에 사라졌다.
애써 지우고 나서야 알았다.
끝나는 일엔, 끝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2002년 봄, 도시는 초록빛 검색창으로 물들었다.
네이버가 등장했고, 세상은 처음으로 ‘초록창’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2004년.
전지현이 캐리어를 끌며 말했다.
“잘 있어. 이제 와서 너무 애쓰지 마.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안녕.”
그 짧은 한마디는 CF를 넘어, 시대의 공기를 바꾸었다.
2004년, 네이버 카페가 탄생했다.
다음 카페에서 네이버 카페로,
사람들은 익숙한 이별을 치르듯, 새로운 공간으로 환승했다.
메일은 추억의 서랍이 되었고,
메신저는 조용한 작별의 신호였다.
이제 우리는 ‘검색’과 ‘카페’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결되었다.
사랑도, 일상도, 그 초록빛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에겐 두 개의 카페가 있었다.
커피 향이 나는 곳,
그리고 초록빛 닉네임이 모이는 곳.
우리는 초록빛 검색창 안에서 새로운 ‘연결의 시대’를 맞이했다.
메일에서 메신저로,
메신저에서 블로그로,
블로그에서 SNS로,
세상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사람들은 쉽게 고백했고, 더 빨리 잊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스팸함을 열어본다.
거긴 대개 비어 있지만,
어딘가엔 아직 읽히지 못한 사랑이
미세한 온도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아서.
“이모, 그 선배는 지금 행복할까?”
나는 잠시 멈췄다.
겨울 창밖으로 저녁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행복하겠지. 그 사람은 늘,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조카가 눈썹을 올렸다.
“그럼, 유학 갔던 그 사람은?”
나는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서 로그인 중일 거야.”
조카가 웃었다.
“이모 세대 사랑은 로그인과 로그아웃 사이네.”
나도 웃었다.
“맞아. 사랑도, 플랫폼처럼 환승하거든.”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참, 선배랑은 가끔 안부를 주고받아.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되었어.
여전히 상대를 먼저 세워주는 사람이고,
그때처럼 말끝마다 ‘씨’를 붙이며 예의를 잃지 않지.”
조카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 아직 연락하는 사이야?”
“응, 가끔 커피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와.
우린 이제 사랑이 아닌, 인생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됐거든.”
나는 살짝 웃었다.
“이젠 그 사람이 커피를 사겠다고 해도
내가 먼저 계산해.
그때의 ‘아니요’가 미안하지 않도록,
지금의 ‘괜찮아요’를 대신 내는 거야.”
조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멋지다. 그건… 진짜 우정 같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점이 선이 되지 못해도,
그 점 하나가 세월 속에서 오래 반짝이면 그걸로 충분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꼭 이어지지 않아도,
빛은 남거든.”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스팸함을 열어봤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딘가엔 여전히 읽히지 못한 마음들이
미세한 온도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국
서로의 받은 편지함엔 없었지만,
서로의 인생엔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사랑은 그렇게
다음 플랫폼으로 환승하며
다른 이름으로 다시 시작된다.
• 한메일(Daum Mail) - 1997년,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로 ‘1인 1 메일’ 시대를 열었다.
• MSN 메신저 - 1999년 7월 첫 출시. “OO님이 로그인했습니다” 알림이 상징적 문장. 2006년 ‘윈도 라이브 메신저’로 리브랜딩 전까지 한국 대표 메신저였다.
• ‘선영아 사랑해’ (2000) - 여성 커뮤니티 마이클럽(MyClub)의 티저 캠페인. 버스, 전봇대, 벽보에 게릴라식 고백문이 퍼지며 국내 티저 광고의 전설로 남았다.
• 네이버(초록창) - 1999년 정식 서비스, 2002년 ‘지식iN’으로 급성장.
2004년 전지현의 “잘 있어. 이제 와서 너무 애쓰지 마.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안녕.” CF가 방영되며,
다음 카페에서 네이버 카페로 모두가 조용히 환승하던 그 시절.
그건 단순한 플랫폼의 이동이 아니라, 시대의 이별 방식이 바뀐 순간이었다.
그 시절, 사랑은 로그인이었고 이별은 로그아웃이었다.
지워진 편지와 남겨진 이름들,
그 사이에서 여전히 미세하게 깜빡이는 ‘읽지 않음 1건’.
아마 그게, 우리 세대가 가장 오래 간직한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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