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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후학- 비와 당신의 이야기

3장 비의 냄새 -마음을 깨우는 페트리코르(Petrichor)

by 유혜성


3장 비의 냄새 - 마음을 깨우는 페트리코르(Petrichor)


맞아요, 좀 과하죠.
비 한 장면에 마음 전체가 젖어버리고
그 마음 때문에 책 한 권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웃겨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비가 오면 당신이 떠오르고
당신이 떠오르면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결국 ‘몸의 기후학’이 되어버렸으니.
이 책은 그렇게, 한 방울에서 시작됐어요._By유혜성


1. 청운문학도서관의 그 냄새


비가 막 그친 서울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폭포 소리와 나무의 결 사이,

그곳에는 늘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냄새가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매번 한 번씩 걸음을 멈추게 된다.


바람 속에 흩어진 젖은 흙냄새,

돌길 위에 살짝 고인 물에서 피어오르는 습한 향,

책장 사이에 오래 머물던 종이의 부드러운 숨결까지.


그 냄새들은

내가 잊고 있던 계절을 다시 꺼내고,

한때 깊이 숨겨두었던 마음을 살짝 흔들고,

언젠가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의 온기까지

같이 데려오는 것만 같다.


이유는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비 온 뒤의 냄새는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장 먼저 깨우는 신호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비가 그친 직후 공기 속에 스며 있는 이 냄새는

어쩌면 우리가 기억으로 돌아가는 비밀 통로인지도 모른다고.


시니위 김종서 ‘겨울비‘

2. 페트리코르 - 젖은 흙에서 피어오르는 첫 기억의 향


젖은 흙냄새를 우리는 대개 이렇게 말한다.


아련하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네.”

“이 냄새, 왜 이렇게 그리워?”


과학은 이 냄새를

페트리코르(petrichor, 비 온 뒤 흙·돌·풀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흙냄새)라고 부른다. ¹


비가 처음 땅을 적실 때,

식물의 뿌리와 흙 속 미생물이 만들어낸 오일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면서 생기는 향.

설명만 들으면 꽤 단순한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냄새는

단순히 “흙냄새”가 아니다.


어느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던 고등학교 운동장,

교복 치맛자락이 다 젖은 줄도 모르고

등나무 아래 모여 비가 그치길 기다리던 오후,


젖은 양말 속에서 발바닥이 문드러질 듯 축축했지만

그게 이상하게 싫지만은 않았던 시절이 있다.


젖은 흙냄새와

친구들 몸에서 풍기던 젖은 교복·샴푸·땀의 냄새가 섞여

하나의 커다란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던 순간들.


그때 우리는

“옷 다 젖었네, 어떡해”보다

“이 비가 조금만 더 오래 왔으면 좋겠다”에 가까운 마음으로

운동장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페트리코르는 그런 장면들을 한꺼번에 불러온다.

• 장마철 골목을 뛰어가던 어린 날의 발소리,

• 우산을 받쳐 들고 처음으로 혼자 걸어가던 등굣길의 공기,

• 여름밤 전깃줄 위로 떨어지던 비와 함께 섞이던, 묘하게 전기 타는 냄새,

• 버스 정류장 등나무 아래,

우산도 없이 비가 그칠 때까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시간.


비 온 뒤 흙에서 피어오르는 이 냄새는

우리가 한 번쯤 살았던 계절과 사랑과 시간들을

압축해서 들려주는 향에 가깝다.


3. 냄새와 기억은 왜 이렇게 강하게 연결되는가


냄새는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빠르게 기억을 깨우는 감각이다. ²


눈으로 보기 전에,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코는 이미 과거로 가 있다.


냄새는 편도체와 해마,

감정과 기억의 핵심을

가장 먼저 자극한다. ³


그래서 소리나 이미지보다

훨씬 날카롭고, 훨씬 깊게

우리의 기억을 흔든다.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 비 내리던 날, 누군가의 젖은 셔츠에서 나던 세제와 피부의 온기가 섞인 냄새.

• 장마철 운동장에서 흙·땀·우비 비닐이 한꺼번에 섞여 올라오던 공기.

• 이별하던 날, 카페 밖으로 쏟아지던 비와 젖은 아스팔트의 냄새.

• 여름밤, 누군가의 어깨에 살짝 기대앉아 들이마시던,

비와 체온이 뒤섞인 공기.


장면들은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기억”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냄새 하나에 통째로 되살아나는 기억이다.


페트리코르는

그 문을 한 번에 열어젖히는 열쇠다.


어떤 날은 감정이 채 준비되기도 전에

기억이 먼저 돌아오는 날이 있다.

대부분 그런 날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4. 페트리코르는 왜 ‘마음을 깨우는 냄새’인가


심리학자 레이첼 허츠는

냄새가 감정 기억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유를

‘감정의 각인(imprint) 구조”로 설명한다.⁴


우리는 냄새와 감정을

쌍으로 저장한다.


그래서 비 냄새는

단순한 자연의 신호가 아니라

어떤 감정을 다시 실행시키는 재생 버튼처럼 작동한다.


비 냄새를 맡는 순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움직임을 경험한다.

• 그리운 사람 쪽으로 몸이 약간 기울고,

• 오래된 감정의 잔상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고,

• 관계의 잔향을 되짚다가,

• 잊고 지냈던 ‘옛날의 나’에게 살짝 돌아간다.


흥미로운 건,

이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는 점이다.


코끝이 먼저 반응하고,

호흡이 약간 깊어지고,

어깨와 가슴 주변의 근육이 아주 조금 느슨해진 뒤에야

마음이 그 변화를 뒤늦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비 냄새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감성의 기후다.


냄새가 먼저 몸의 기후를 바꾸고,

그 뒤에 마음의 날씨가 바뀐다.


5.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비 냄새


비 냄새는 계절마다 표정이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정확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몸으로는 다 알아차린다.


• 봄비의 냄새

겨울 내내 마른 흙 위로

미세먼지와 묵은 공기를 한 번에 씻어내리는 듯한 냄새.

아직은 차가운데, 어딘가에서 새싹의 아주 연한 초록이 섞여 있는 향.

텁텁함과 산뜻함이 동시에 나는 공기 속에서

우리는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자주 꺼낸다.


• 여름비의 냄새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함께

뜨거운 아스팔트, 풀, 흙, 사람의 땀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온다.

후덥지근한데 이상하게 상큼하고,

수박과 참외, 젖은 운동장, 에어컨 실외기 냄새까지 섞여 있는 공기.

여름비의 냄새는 조금 ‘과하고’ 조금 ‘젊다’.

그래서인지 젊은 날의 기억은

유독 여름비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 가을비의 냄새

젖은 낙엽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일 때 나는,

약간 쓸쓸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

나무와 흙, 찬 공기의 조합 속에서

우리는 문득 지나온 계절을 돌아보고

“올해도 어쨌든 여기까지 왔네”라는 생각을 한다.

가을비는 마음을 서늘하게 하면서도

묘하게 로맨틱하게 만든다.


• 겨울비의 냄새

차갑고 금속성에 가깝다.

눈으로 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기 속에서

젖은 콘크리트와 히터 바람, 젖은 목도리 냄새가 뒤섞인다.

겨울비는 우리를 더 먼 과거로,

혹은 아주 깊은 생각 속으로 데려간다.

“이런 날엔 왠지 예전 생각이 많이 난다”는 말은

대체로 겨울비가 오는 날에 나온다.


이렇게 비 냄새는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가지고,

그때마다 다른 기억의 서랍을 연다.


몸의 기후학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날씨의 변화를 읽기 전에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먼저 맡는다.


그리고 그 계절의 냄새는

그 시절을 가장 또렷하게 품고 있던 순간과

그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그때의 나를

다시 불러 세운다.

6. 사랑과 페트리코르 - “나는 왜 이 냄새만 맡으면 너부터 떠오를까”


사랑은 냄새와 얽힐 때

가장 오래 남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공간의 냄새,

함께 걷던 계절의 공기,

비를 맞고 난 뒤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와 빗물의 섞인 향,

우산 아래 아주 좁은 공간에 갇힌 두 사람의 체온.


이 모든 것이 비 냄새와 함께 저장된다.


그래서 어떤 냄새는

한 사람을 아주 정확하게 소환한다.


지금은 곁에 없든,

멀리 떠났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든 상관없이,


비 냄새는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순간의 뼈대를 그대로 불러온다.


“나는 왜 이 냄새만 맡으면

꼭 너부터 떠오를까.”


그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시간이

몸과 후각에 가장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은 이미 알고 있다.

그때의 심장 박동,

그때의 체온,

그때의 호흡 속도까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비 냄새와 함께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비 냄새는

우리를 다시 누군가에게로 기울게 하는 향이다.


7. 비 냄새는 마음의 가장 오래된 주소다


페트리코르가 전하는 메시지는

사실 아주 단순하다.


“당신 마음은 아직 살아 있다.”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고,

다시 사랑할 수 있고,

감정이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비 냄새는

감정을 흔들지만

감정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그리움을 데려오지만

절망만 남기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해줄 뿐이다.


“괜찮아.

네 마음은 여전히 따뜻해.

아직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아직 기억을 품고 있는 몸이야.”


비 냄새는

자연의 신호이자, 마음의 기록이다.


페트리코르는

우리가 살았던 시간을 데려오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시작해도 괜찮겠다는 용기를 건넨다.


비의 냄새는 결국

마음의 가장 오래된 주소다.


그곳에서 우리는

잊었던 감정을 다시 만나고,

놓쳤던 이름을 다시 생각하고,

언젠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되찾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오늘도 네 몸의 기후는

아직 사랑 쪽으로 기울어 있어.”



강인원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각주


¹ ‘페트리코르(petrichor)’라는 말은 그리스어 petra(돌)와

신들의 피를 뜻하는 ichor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언 매콜, 《페트리코르의 비밀》, 김민정 옮김, 윌북, 2021.


² 레이첼 허츠, 《냄새의 심리학》, 이경아 옮김, 알키, 2015.

³ 정재승, 《열두 발자국》, 어크로스, 2018.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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