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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후학

4장 비와 몸의 리듬-기압, 호흡, 그리고 필라테스

by 유혜성

4장 비와 몸의 리듬 -기압, 호흡, 그리고 필라테스


비가 얼굴을 때리는데도 우린 웃었어.
너는 따뜻했고, 나는 어리석게 설렜지.
그 감정이 내 몸에 남아 책이 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 _By유혜성
박혜경의 ‘Rain’

비가 내리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스튜디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회색빛 비가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들의 봉인을

조용히 풀어내고 있는 듯했다.


그날 나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필라테스는 원래 음악 없이도 충분하지만

나는 혼자일 때 가끔 조용한 멜로디를 배경처럼 틀어두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어떤 음악도 손이 가지 않았다.


창밖 비가 이미

내 몸이 따라야 할 첫 박자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두둑.

천장을 두드리는 가느다란 리듬.


또르르.

유리창을 따라 흐르며 이어지는 한 줄의 선율.


툭, 툭.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낮은 드럼의 박동.


그 소리에 맞춰 내 호흡이 달라지고,

그 호흡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들이쉬는 숨에는

비의 냉기가 가슴 안쪽까지 스며들어

감춰두었던 감정 한 조각을 깨워 올렸다.


내쉬는 숨에는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비가 오는 날, 몸은 음악보다 먼저 리듬을 만든다는 것을.


그 리듬 안에는

지금의 나,

어제의 사랑,

아직 오지 않은 그리움까지

한 박자로 겹쳐져 있었다.


비, 몸, 사랑.

이 셋은 사실 서로 다른 언어가 아니라

같은 리듬의 다른 표현이었다.

2. 비가 오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유 - 기압의 변화는 마음보다 먼저 몸을 흔든다


비구름이 가까워지면

대기의 기압은 아주 은밀하게 내려간다.

이 미세한 변화가

가장 먼저 흔드는 것은 언제나 몸이다.


관절과 근막은 기압 변화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혈류 속도는 달라지며,

자율신경계는 이 변화를 즉각 감지해

몸 전체의 긴장도를 조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 오기 전 이렇게 달라진다.

• 몸이 축 처지고 무거워지고

• 평소 없던 두통이 올라오고

• 감정이 말랑해지거나 불안정해지고

• 한 사람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고

• 뜨끈한 국물이나 탄수화물 같은 ‘위로하는 음식’이 당기고


이 반응들은

당신이 예민해서도 약해서도 아니다.

몸이 지나치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기압 변화라는 작은 신호에

인체가 먼저 답하고,

그 뒤에야 마음은 뒤늦게

“왜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 이유를 붙인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

이것이 바로 몸의 기후학이다.


당신의 몸은 언제나

당신보다 먼저

감정의 기압을 읽고 있었다.


3. 비와 호흡 - “우리는 비가 내릴 때 더 깊게 숨을 들이쉬는 존재다”


비 오는 날, 사람은 이유 없이 숨부터 달라진다.

평소보다 더 깊고, 더 천천히,

마치 오래 묵힌 마음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듯이.


습도는 서서히 차오르고,

서늘한 공기는 기관지와 감정선을 동시에 스친다.

그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더 깊이 들이쉬고,

조금 더 정직하게 내쉰다.


숨은 우리 몸에 걸린 하나의 현(絃)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면 가볍게 떨리고,

아주 작은 바람에도 울리는 현.


비가 내릴 때

그 현은 유난히 쉽게, 유난히 길게 울린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엔

묻어두었던 관계가 가볍게 흔들리고,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문득 피어나

오래전 얼굴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필라테스에서 말하는 호흡,

코로 깊게 들이쉬고,

입으로 길게 내쉬는 그 리듬은

비 오는 날 가장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든다.


왜냐하면

몸은 이미

비와 같은 속도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박자,

비–숨–심장이

세 겹으로 포개지는 어느 순간,

사람은 다시 사랑을 믿고 싶어진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은,

아주 은밀한 봄이

심장 안쪽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그리고 그 박자는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기에

참 좋은 속도다.

4. 비 오는 날, 몸이 더 ‘선명해지는’ 이유


비 오는 날,

사람들은 흔히 몸이 더 무겁다고 말한다.

기운이 가라앉고,

움직이기 싫어지고,

괜히 더 느려진 것 같다고.


하지만 그 느낌이

몸의 실제 상태를 그대로 말해주는 건 아니다.


비구름이 대기 위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기압은 아주 조용히 내려가고,

그 변화에 맞춰 관절과 근막은 미세하게 풀린다.

몸이 말랑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공기 속에 스며든 서늘한 습도는

신경계를 긴장에서 안정 쪽으로 이끈다.

부교감신경이 켜지는 순간,

호흡은 자연스레 깊어지고

몸은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의 몸은

겉으로 보기엔 처지고 느릿해 보일 수 있지만,

안쪽에서는 오히려

감각과 움직임이 또렷해진다.


다리는 더 가볍고,

척추는 더 유연하게 흐르며,

골반의 작은 각도 변화도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진다.


호흡은 깊어지고,

감정은 흥분보다는

조금 더 차분한 층을 갖게 된다.


전문용어를 길게 늘어놓는 것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비 오는 날,

몸은 귀를 열고

마음은 여백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여백은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딱 알맞은 온도다.


비가 내릴 때

우리 몸이 ‘선명해진다’는 말은

몸이 더 가벼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불필요한 긴장을 내려놓고,

사랑이 들어와도 괜찮을 만큼

몸이 먼저 자리를 비워두었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엔

괜히 연애가 하고 싶어지고,

괜히 사랑이 다시 가능할 것 같아진다.


몸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리듬이라면,

다시 누군가를 맞아도 괜찮다는 것을.


5. 몸이 말해주는 것 -”지금은 보호가 필요한 시간”


비가 오는 날,

라면·우동 같은 뜨끈한 국물 음식이 떠오르고

어김없이 파전에 막걸리가 생각나며

이상하게도 밀가루나 탄수화물이 당긴다.


이는 단순히 배고파서가 아니다.

몸이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나를 조금 더 따뜻하게 감싸줘.”


비가 내리면

기압이 낮아지고 혈당 조절 호르몬(세로토닌·도파민)의 분비가 흔들리며

우리 몸은 안정과 위안을 주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찾는다.

따뜻한 국물의 온도는

신경계를 안정시키는 부교감 반응을 강화하고,

밀가루·탄수화물은

순식간에 세로토닌을 끌어올려

‘심리적 담요’를 덮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파전·부침개·막걸리가 당기는 이유도 있다.

기름이 지글거리며 부서지는 소리와

팬 위에서 튀어 오르는 일정한 리듬이

빗소리와 매우 유사한 주파수를 갖기 때문이다.

몸은 그 반복적인 소리에 반응해

“지금은 안정을 취할 시간”이라고 해석한다.


이 모든 것은 우울의 신호가 아니라

몸이 회복을 준비하며 보내는 신호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감정을 눌러두던 힘이 약해지고,

몸의 욕구와 감각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특정 음식을 찾고,

특정 얼굴을 떠올리며,

익숙한 온기를 그리워한다.

이 모든 것은 몸의 정직한 언어다.

6. 필라테스, 그리고 비 - 몸을 지휘하는 사람의 리듬


필라테스를 할 때 나는 늘 이렇게 느낀다.


“나는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 몸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이다.”


비 오는 날엔

그 감각이 더 치명적이고 더 은밀하게 살아난다.


척추가 말려 들어갈 때

빗줄기가 내리는 각도처럼 느껴지고,


갈비뼈가 열리고 닫힐 때

창문에 맺히는 물방울처럼 반짝이며,


숨을 내쉴 때

흐릿해진 감정들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나는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몸, 내 기억, 내 사랑까지 지휘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비는 언제나

내 몸의 사운드트랙이었다.

7. 비의 리듬은 결국, 살아 있다는 증거다


비는

우리 몸의 리듬을 깨우는 기후다.


기압의 변화,

호흡의 진동,

조직의 이완,

감정의 문.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사람을 더 부드럽고 더 솔직하게 만든다.


비 오는 날 필라테스를 하면

나는 늘 이렇게 느낀다.


“비가 내리고,

내 몸이 응답하고,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새로운 사람을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

놓쳤던 감정 하나를 조심스레 다시 집어 들고 싶어진다.


비는 결국

몸과 마음이 다시 사랑을 품어도 좋다는 것을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허락하는 기후다.


그리고 그렇게 허락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또렷하게 실감하게 된다.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참고문헌

• 다케우치 노조미, 《날씨가 몸을 아프게 합니다》, 이지수 옮김, 시프, 2021.

• 정지현, 《자율신경의 교과서》, 유주연 옮김, 심플라이프, 2019.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장호연 옮김, 을유문화사, 2018.

• 윌리엄 시겔·크리스틴 로브, 《스트레스의 숨결》, 정명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 라이사 나이덤, 《마음은 왜 음식을 원하는가》, 김아영 옮김, 윌북, 2020.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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