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희미해지길 바란다면.

by 수수

가장 희미해지길 바란다면.


나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 첫 번째 기억은 언제일까. 어렸을 때 기억이 명료하지 않다. 오히려 운동을 시작하고 약 10년의 역사는 또렷한 게 더 많은 것 같고 심지어 어떤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은데,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행복한 기억으로 붙잡고 싶은 게 없어서 일까. 사실 그전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데, 글재료 덕에 이런 생각을 해보네. 왜 어렸을 때 놀이동산이나 유원지 같은 데서 만나는 캐릭터 풍선을 보고 갖고 싶다고 생각하고 날아가지 않게 꼭 쥐곤 하지 않나.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엔 그런 쥐고 싶은 풍선 같은 게 없는 걸까, 아니면 머리가 다 자라고 나니 그랬다고 인식하고 정리한 걸까.


물론 내게도 어떤 기억들이 있다. 칼에 베어 그뒤로 칼을 무서워했던 것, 엄마 몰래 믹스커피를 타먹었던 것, 세들어 사는 집주인 할매랑 놀았던 것, 개한테 까불다가 물렸던 것, 그 집에 무화가 나무, 아빠가 해준 커틀릿을 케찹에 발라 먹었던 것, 교통사고를 당한 것, 첫 친구가 생겼던 것 등등. 그것이 언제가 먼저인지, 그래서 무엇이 처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물론 여럿 존재하고, 그 모든 것이 슬프거나 좋지 않거나 화나거나 투성이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록 첫 번째 기억도, 가장 오래된 기억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 고통의 기억이라 부를만한 것이 있다. 그 기억이 꽤 오랜 시간 그게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기억들은 내가 가장 오래됐다거나 혹은 첫 번째라거나 의미 있다거나 주장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기억은 그런 맥락 속에서 뒤섞이기도 하고 재배치되기도 하니까.


아빠가 자해를 했다. 아빠가 내가 보는 앞에서 자해를 했다. 아빠가 내가 있는데 자해를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아빠는 나 몰래 산 커터칼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신의 딸 앞에서. 붙잡으려 했는데 다시 집을 떠나려는 엄마를 붙잡으려고. 자신의 고통을 보여주려고. 그런데 사실 그게 얼마나 진절머리 나면서도 무서운 폭력인지도 모르고, 아빠는 자해를 했다.


아빠는 그 행위로 죽지 않았고, 죽으려고 한 행위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목적을 달성했다. 엄마는 다시 집에 들어왔으니까. 나는 툭하면 집을 나갔던 친구의 엄마 이야기가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엄마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를 두고 집을 나갔었다. 자신을 붙잡으려고 제 몸을 칼로 긋기를 했던 이의 옆에 나를 뒀다고 생각하면 좀 소름 끼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나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나의 부모이고 나는 그들의 딸이어서 언젠가부터 나는 나의 아빠를, 나의 엄마를 이해해버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아빠에게, 나의 엄마에게 몹시 화가 났었고 슬플 때가 있었다.


이것에 대해 감정의 격한 파동 없이 말하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것이 나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문제 혹은 어쩌면 그들로부터도 나온 문제가 아닌 그들 각자의 문제로 들여다보아야 함에 대해,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주고만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해석해보고 다시 나를 오롯하게 세워두기까지 오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폭력에는 그런 계산이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폭력은 나누려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나눠지고 제각각 다르면서도 공통의 상처가 되어서 수십 배가 되기도 하고, 화도 되고 슬픔도 되면서 여러 감정으로 섞여버리기도 한다.


원가족과의 이 경험과 감정들은 인생의 오랜 시간 여러 색깔로 바뀌고 높고 낮은 온도가 되어 내 인생에, 당신 인생에도 존재하겠지요. 붙잡고만 싶은 기억들 속에서 희미해지는 것이 되려 행복함이 되는 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기억 상실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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