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영화_최선의 삶

by 수수

‘더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더 나빠졌던’, 한때 ‘우리’였으나 순식간에 ‘좆밥’이 되는 이상했고 무서웠고 좋아했던 강이와 아람이와 소영이를 만나고 왔다.


원작인 임솔아 작가의 소설 <최선의 삶>을 읽었을 때, 신형철 평론가의 글처럼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 믿을 때, 나 역시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은 아득해져버려 글보다 더 강하게 이미지를 줄 영화를 보고 오고 말았다.


‘더 나아지려고 기꺼이 더 나빠졌던’ 마지막 나레이션이 콕 남았다. 그것은 과연 더 나아지는 걸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더 나아지는 게 맞았을까. 더 나아질 수나 있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조용히 밀려와서 파도인지도 몰랐던 물결을 만난 것처럼 가슴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고개를 파묻고 흘러가는 크레딧 앞에서 조금 울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공감하고 아플 경험했던 것들이 아니었는데도 뭔가 그 사이사이 흐르는 감정이나 기운에 울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영화로 인해 계속 묵직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영화를 보기 전 즉흥적으로 쓴 기억에 대한 나의 글을 생각하고, 다시 읽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날 것 같았지,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그러다 영화 제목을 검색하고 만난 아람 역할의 심달기 배우의 인터뷰 제목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늘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했다”는 글귀를 읽자, 이상하리만큼 요동치던 마음이 평온하다 느낄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아빠의 자해 당시에도,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기억이라 여겼던 긴 세월에도 그 기억이 나를 압도해서 쓰러지게 두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건 너무 나에게 아까운 행위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나는 다시 나를 다독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강이를 보면서 느낀 그 무겁고 답답하고 슬픈 것이 무엇일까 몰랐는데, 조금 가닥이 잡히는 것 같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해, 그게 뭔지도 모른 채, 내가 견딜 수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최선을 다해, 이를 악물 듯이 강이는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강이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억울함이 가슴에 가득 차고, 또 터지지도 못해 이러다 죽겠는데 살아 있고, 살기 싫은데 죽을 수 없지 않는가 싶어져서. 오늘 오후에 들은 ‘환란의 세대’를 들을 때와 비슷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 기운이 매우 달라서 매우 힘들었다. 이 영화는 위로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니지만.


초반에는 심달기 배우를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아람에게 눈길이 갔다. 아빠의 폭력에도 해사한 아람. 길에 버려진 장갑이 슬퍼 보여서 줍고 아껴주는 아람. 아무 생각 없이 가장 해사해보이지만, 매일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버리지도 못하고, 사랑을 버릴 생각도 없는 아람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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