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거주하는 동안 물음표집을 거쳐 혼자 살기 시작한 남산동집, 친구와 동생과 같이 살았던 율하동집을 지나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고 있는 지금의 느집(신암동집)까지 모든 이사에 친구들이 함께 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이젠 짐이 늘어나니 이삿짐센터를 이용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늘 다음번 이사에는 그래야겠다고 미루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디 집뿐인가. 8년이 넘게 일하는 임금노동단체 사무실 이사에도 늘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때의 ‘친구들’은 서로 다르지 않는 동일한 인적 구성원들이 대부분인데, 그것은 나의 공적 삶과 사적 삶이 큰 격차와 구분 없는 삶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을 나누는 친구들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니 20대 중반 이후 나의 집의 역사를 바라볼 때, 친구들 이야기는 결코 빠질 수가 없다.
작은 경차에 한두 번 정도 운반이면 되었을 물음표집으로의 이사에는 ‘유쾌한 잉여’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다.(유쾌한 잉여는 경대 서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친구들과 작당을 할 때 만든 포럼 이름이었다) 누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물음표집에 들어갈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니까 정확한 기억인지 아닌지에 매달리진 않기로 하자. 작은 경차에 한두 번으로 끝날 적은 짐을 가지고 간 물음표집에선 책장도, 책상도, 의자도 모두 물음표집의 공용 물품을 사용할 수 있어서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을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공동의 약속을 만들며 살아본 주거공동체에서의 삶. 함께 살았던 구성원들의 생일을 챙기고, 함께 밥을 해 먹고 술을 마시고 김장을 했던 주거공동체에 대한 경험은 나에게 조금 다른 삶에 대한 고민과 바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2년을 꼬박 살고 물음표집을 나와 남산동에 새로 혼자서 살아갈 집을 구했다. 그 정도의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가진 것 하나 없었던 나를 품어준 주거공동체 물음표집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음표집에 들어올 때와 달리 그 집을 나갈 때는 짐이 많아졌다. 경차 한두 번으로 끝났던 나의 이삿짐은 1톤 트럭을 불러야 할 만큼 늘어있었다. 주로 책과 옷이 늘었고, 침대 등 친구들이 준 것들로 나의 생활 짐은 늘었다. 경차에서 1톤 트럭으로 짐이 늘어난 것은 물건 자체가 늘어난 일인 단순한 결과이지만,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늘어나고 쌓인 것들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와 내 친구들이 함께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지내기 위해, 함께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늘어난 것들로 말이다. 나의 삶에는 그렇게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상상되고, 준비된 것들이었다.
물음표집에서 남산동으로 이사할 때가 기억에 남는 건 그때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과 한 첫 이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야흐로 ‘나의 이삿짐센터는 친구들’이란 이름이 시작된 것이다. 함께 세미나하고, 함께 집회를 가고, 함께 자원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고, 노동력을 들여 너무나 나의 사적 공간이고 말 집 이사를 도와주었다. 그들 모두가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해주었던 것은 우리가 서로의 일을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나의 사적 공간을 정말 사적 공간으로만 치부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공간으로 여겨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삿날, 이동 담당인 1톤 트럭을 빌리고 이른 아침부터 친구들과 모여 짐을 옮겼다. 3층 물음표집에서 짐을 하나하나 내리고 트럭에 싣고 2층의 남산동 집에 짐을 또 다시 하나하나 올렸다. 이사 초보들의 좌충우돌 이사가 끝나고 인근의 맛있는 중국요리 집에서 이사완료 회식을 했다. 그때 식사도 이사하느라 고생했다고 선배가 저녁식사비를 지원해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 집 역시 물음표집 만큼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찾아주었고, 함께 공부를 하고 보드게임을 하고 밥을 먹는 시간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때의 이사가 기억에 남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누군가의 부재가 이때를 기억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때 C는 청도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다 경찰의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불법시민이 되어 구치소에서 두 달이 넘는 시간을 지내야 했다. 이후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법원의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고, 특히 매일 만나던 동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나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이사 베테랑 C 없이 서툰 솜씨지만 함께 힘을 내며 이사를 마쳤고, 그에게는 ‘네가 없어서 이사가 참 힘들었으니, 다음에 배로 책임을 지라.’는 미션을 주었다. 지금이야 깔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때의 기억은 우리가 어떤 시간을 함께 겪어냈고, 어떤 어려움들 속에서도 함께 해왔는지 잊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우리가 함께한 다음 이사는 그로부터 1년 뒤였다. 남산집에서 혼자 살던 나는 함께 활동을 하던 K와 하우스메이트가 되었고, 괴팍한 집주인을 떠나 새로운 거처를 구하기로 했다. 마침 서울에서 대구로 동생이 이주할 계획이었기에 더 큰 집에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구 봉덕동에서 중구 남산동을 거쳐 동구 율하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의 이사 역시 이삿짐센터가 아닌 친구들이 하게 해주었다. 남산집에서 율하집으로 이사 갈 때는 짐이 훨씬 많이 늘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짐에서 두 사람의 짐으로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음표집에선 공용 가구를 빌려 썼기에 없어도 됐던 개인 가구들과 가전제품들을 모두 사야했기 때문이다. 풀옵션 원룸 지향자가 아니었기에 중고제품으로 필요한 옷장과 책장, 냉장고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고, 이것들은 모두 이삿짐의 규모를 늘리는 이유가 되었다. 계속해서 거주의 이동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짐을 줄이는 것은 필수적인 선택이 될 때가 많다. 매년 이사를 하면서도 이고 가야할 짐을 계속해서 늘리는 사람이 나다. 그 짐의 항목에는 내 욕심의 결과인 책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친구들이 오면 덮고 자야할 여분의 이불들과 그들이 입을 잠옷들도 있다. 그래서 친구는 나의 그 선택이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말해주었다.
율하동으로 이사를 갈 때도 남산동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1톤 트럭이 등장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트럭이었다. 우리는 한 정당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당의 트럭을 하루 빌려 이삿짐을 옮겼다. 운전하기 까다로웠던 그 트럭은, 앞서 말한 구치소에 있느라 이사를 함께 못한 C가 베테랑처럼 몰 수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인가 싶게 잘 싸고 잘 옮기던 C와 J 덕분에 짐은 늘었지만, 이사는 수월할 수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이삿짐센터 부르는 게 더 싸겠다.’며 농담을 한 저녁 외식을 거하게 했다. 하지만 그 둘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번거롭고 서툴러도 친구들에게 매번 부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삿날은 모두가 만나는 만남의 장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미리부터 일정을 조율하고, 같이 땀을 흘리고 이사를 하고, 함께 저녁을 먹는 것과 같이.
1년이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친구들의 힘을 빌려 이사를 했다.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고 있는 신암동의 아파트로의 이사가 그것인데, 이때의 이사가 나와 친구들이 함께한, 아직까진 마지막 이사가 되었다. 물론 이건 내가 살아가는 집의 경우이고, 우리는 그 이후에도 사무실 이사 등을 함께 했다. 여하튼 이때의 이사는 이전까지 살던 집과는 달리 고층으로의 이사였기에 사다리차를 빌렸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직접 했다. 그 사이 세 사람으로 늘어난 사람 수와 늘어난 짐의 규모를 보고 다음 번 집 이사는 꼭 이삿짐센터를 이용하기로 친구들과 약속했기 때문에 아마 다음번 집 이사는 다른 이사의 경험이 될 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우리는 그때도 같이 모여 있을 것 같고 같이 저녁을 먹을 것 같다. (엠케가 이사를 할 때 포장 이사를 해서 우리가 할 게 없었는데도 새로운 집에 모여 중국요리 외식을 한 것처럼)
거주 공간을 옮기는데, 친구들과 함께 하니 이사가 이사만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단순히 거주지의 이전이라기 보단 친구들과 나누었던 시간들이 하나의 재산이 되어 이동되는 듯 했고, 이사 과정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이 쌓이는 추억의 여정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대구에서 살면서 경험한 이사 이야기는 공간의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시간이고, 함께 나눠온 사랑과 실제적인 힘이란 것을 깨닫는다. 나의 이삿짐센터는 친구들이란 말은 그 친구들을 이용했다는 뜻도, 부리기 쉽다는 따위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친구들의 기꺼운 마음이고,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