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이름이나 너, 야로 불리다가 무언가 부탁이 있거나 미안한 말을 할 때는 언니라고 불리기도 하는 나. 그렇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다.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부모와 자녀, 언니와 동생이라는 가족관계 내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마는 위계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고 있겠지만, 적어도 서로를 칭하는 호칭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듯싶다.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매는 우리를 낳은 엄마에게도 엄마라는 호칭을 여전히 사용하긴 하지만 그녀를 그녀의 이름으로 호명하고 있다.
사실 우리 자매의 관계가 친밀할 수 있다고,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 말은 자매란 이유로 당연히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단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더 오래 존재했던 인생이었다.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고, 서로의 내밀함을 나누거나 서로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다. (동생은 나를 아주 많이 미워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당연하게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꿔온 나라고 해도, 그 대상이 동생일 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동생과 같은 집에서 매일을 공유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꿈꿔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우리는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 예상할 수 있는 당분간의 미래 역시도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아갈 하우스메이트일 것이다.
정말 동생과 같은 집에서 살게 될 거라 그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십 대 중반의 어느 날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엄마와도 동생과도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 날에 우리 세 모녀는 영천의 한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강변의 산책로를 걸었던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에 와서 떠올릴 수 없지만, 그날 나는 어쩌면 내가 엄마의 딸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혹은 내가 엄마의 엄마로 위치를 바꿔야만 하는 게 아니라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나는 어쩌면 동생이 미워하는 언니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생과 서로를 나누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떨까. 10년 전에 어쩌면 우린 달라질지도 몰라, 생각했던 그 가능성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원가족 관계에서 오는 여러 갈등과 부침, 위계와 고민들이 존재한다. 수많은 시간을 싸우며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관계로 멈춰있지 않다.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확장될 가능성이 열려있고,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것은 나의 제안이었다. 서울에서 몇 년을 거주했던 동생이 다시 돌아오려 할 때, 나는 그녀에게 대구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이미 친구와 살고 있었기에 그 친구와 나 그리고 동생에게 모두 함께 살자고 했다. 나와 달리 굉장히 내향적이고 혼자만의 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생에게 그 제안은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매우 어려운 도전과도 같았다. 게다가 우리 집은 주거공동체에서 살았던 때부터 이어져 늘 친구들이 찾아오고, 맞이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존재감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은 동생에게 처음인 것들이었다.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동생에게는 그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운 일이 되기도 했다. 그녀와 달리 나에게 집은 언제나 내가 마음을 옹졸하게 갖지 않고 환대할 수 있기를 꿈꾸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강조점인 부분이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우리가 부딪히는 부분도 그 지점이었고 늘 토론하고 합의하는 부분도 그 지점이 되었다.
다른 것들을 동생에게 맞추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큰 방을 동생이 사용하는 것도(어차피 그 외 모든 공간은 대부분 내가 점유하다시피 하지만), 청소 스타일이나 사소하지만 너무 다른 스타일이었던 빨래에 대해서도 모두 동생에게 맞췄다. 동생은 굉장히 깔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맞추면 더 좋아질 일이지, 나에게 나쁜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방문과 관련해서 초반에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겪었고 여전히 그것은 다투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쩔 수 없어 하면서도 함께 사람들을 맞이하고, 마음을 내어주는 그녀를 발견한다.
나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그녀의 관계 역시 확장되길 희망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며 만난 사랑하는 친구들과 동생이 서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영향들이 서로의 삶에 흐를 수 있기를 바랐다. 친구들에게 동생을, 동생에게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함께하는 시간들도 조금씩 만들어갔다. 낯가림이 엄청 심하고, 그 관계들을 불편해하기도 했던 동생도 시간이 흐르면서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고, 편한 사이가 된 친구도 생겼다. 조금씩 함께 나누는 생활의 부분들도 생기게 되었다. 성공했다고 말하기엔 여전히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런 변화들이 나는 너무 반갑고 기쁘다.
얼마 전, 아파서 입원을 했을 때 동생이 편지를 써줬다. 그녀는 편지에 “언니는 나의 베스트프렌드야.”라고 했다. 한때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나였던 사람에게 듣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동생이 하우스메이트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고 여전히 같이 살고 있다. 많은 날을 싸우고 화해하고 대화하고 합의하면서 각자의 집이 아닌 ‘우리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많이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서로의 것을 거리낌 없이 공유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원가족이라고 관계의 형태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동생과 나는 함께 살면서 매일 부딪히고 매일 다시 배우고 있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하우스, ‘메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