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살아요.”
지금은 사라진, 좋아했던 카페에서 D는 말했다.
그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시민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던 우리들은 서로 알게 되었고 나는 D가 주거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몹시 흥미를 끄는 요소였다. 당시 나는 고시원을 지나 아는 선생님이 빌려둔 사무공간이자 숙소인 곳에 얹혀살고 있었다. 대구에서 일을 계속 해야 했기에 안정적인 주거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진 돈은 없고, 고시원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 나에게 주거공동체라니. 아니 그게 뭐예요? 뭔데요? 궁금증으로 눈이 반짝일 수밖에.
당시 친환경 생활을 노력 하는 그린집에 살고 있던 D는 바로 인근의 집을 구해 2호집을 만들었다. (그린집은 환경단체의 실험으로 만들었던 집으로 실험 종료 후에도 함께 살아가고 싶은 이들이 남아 만든 집이었다) 나는 성격도 규정되지 않은 2호집의 초기 멤버가 되었다. 그렇게 2호집은 D가 다시 또 집을 구해 3호집인 고집(고양이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나, D, H 세 사람이 살았고, 이후 가장 작은 방에 웒이 들어와 네 명의 멤버가 완성되었다. 이때까지의 과정에서 질문을 들었고, 나 역시 엄마에게 말하기 전에 고민했던 부분은 성별이었다. 여성 혼자인 것에 대해 고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엄마 역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고, 나 역시 그럴 수 있었다.
D가 이사 나간 뒤로는 대전살이를 마치고 대구에서 살아보고 싶어 했던 M이 그 방에 들어와 복작복작 생활을 이어갔다. 미지는 당시 내가 하던 활동을 함께 했기에 우리는 바깥에서 같이 활동하고 집에서 같이 먹고 놀았다. 가장 큰 방이었던 내 방에는 얼마간 친구들이 살다 가기도 했다. 유녕이나 세화는 한 달 치의 공용 생활비를 내고 내 방에서 같이 생활을 했었다. (이 새로운 거주 방식으로 물음표집은 공용 생활비 비율을 조절하는 등 새로운 회의를 하며 함께 결정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 집을 경험한 이들이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에 여전히 친구로 존재하기에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추억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거나 아주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시간이 갈수록 더욱 느끼게 된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 주거공동체는 봉덕동을 기반으로 서로 인근에 집을 두었다. 3개의 집이 있었고 서로의 집은 부담 없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했다. 각자의 집마다 성격이 달랐는데, 점차 느슨한 관계로 함께 사는 사람들을 확장해 나가려는 시도에서 그랬던 것 같다. 앞서 썼듯 환경단체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했던 1호집은 공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좋아서 실험이 끝나고도 계속 쭉 살기로 합의하면서 출발되었다. 그린집은 친환경생활을 지향하는 곳으로 몇 가지 약속들을 가진 집이었다. 먼저 쓰레기 배출 만들지 않기. 그래서 화장실에 화장지를 두지 않았다. 이 규칙은 여러 방문자를 놀라게 한 규칙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린집으로 주거공동체를 처음 알게 되었던 터라 그 규칙은 좀 버거워서 함께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지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잘 지켜나갔고, 그 외에도 채식으로 식사하기, 식사 당번 돌아가면서 하기 등의 규칙이 있었다.
처음에 그린집에 살던 D가 새로운 집을 구하면서 그 새로운 집의 성격은 조금 달라졌다. D는 주거공동체를 더 다채롭게 확장하기 위해 그린집에서 나왔다. 그린집 맞은편 골목에 있는 3층 주택을 구해 같이 살아갈 구성원들을 찾고 있었다. 그 집은 아직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시작부터 규칙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불변은 아니다. 주거공동체의 각 집의 정기회의는 물론 주거공동체 전체의 정기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별 고민하지 않고 주거공동체 일원이 되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살 곳이 필요했기에 주거공동체에 산다는 것은 혼자 사는 삶과 다른 매리트가 있었다. 각자의 독립된 방외에 함께 사는 집의 공용공간이 혼자 살아갈 집보다 더 넓어진다는 것이 그랬고, 혼자 사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나는 원룸 따윈 다시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2013년 5월, 나는 친구의 차를 이용하여 2호집인 물음표집으로 짐을 옮겼다. 공용 창고에 쓸 만한 빈 책장들이 있었고, 의자도 있었기 때문에 생활을 위한 가구를 사지 않아도 되었다. 책장들을 이용해서 책을 꽂을 공간과 옷을 두는 공간을 구분하여 방을 꾸몄다. 나에게 본격적인 대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내게도 많은 영향을 준 주거공동체로서의 삶 역시 시작되었다.
그 집을 구한 사람이 D였으니 처음 입주한 것도 당연히 D였다. 당시 D는 2호집의 가장 큰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보다 짐이 더 많은 사람이어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집의 가장 큰 방을 나에게 내어주었다. 그것은 D가 가진 특유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러나 환대와 세심이었던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D가 기꺼이 내어준 가장 큰 방에 나의 공간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짐이 적은 H와 D는 주방을 끼고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방에 살았다.
그들과 함께 사는 건 생각보다 큰 어려움 없이 합의의 지점이 만들어졌다. 세세하게는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던 D와 사용하는 나 사이에 개별 물품이니 알아서 하자보단 집에서 쓰는 공용물품으로 구매하기로 합의가 만들어졌고, 공용공간의 청소구역을 나누었고, 두 사람에 비해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옷을 껴입고 산다 해도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후 공동생활비에서 추가되는 난방비 부분을 2호집은 따로 분담하기로 합의한 점 등이 있다. 또 우리에겐 한 가지 룰이 있었다. 손님 방문에 관대할 것. 손님이 방문할 때는 허가제가 아닌 무조건 신고제 방식이었다. 단 자기 방이 아닌 공용공간인 거실에서 자야한다면 그 부분은 미리 양해를 구하기로 하고 말이다.
내가 사는 집이 물음표집이었던 시절, 아마 그 집을 거쳐 가지 않은 친구들은 없었을 것이다.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시절 친구들, 새로 만난 친구들, 같이 하던 모임의 친구들도 모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물음표집에 방문했고, 같이 잠을 자고, 무엇보다 함께 밥을 먹었다. 그뿐 아니다. 엄마도 동생도 서울에 살던 나의 조카들도 이 집에 머물다 갔다. 서울로 집회를 가기 전날이나 혹은 어딘가에서 집회를 하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물음표집 거실에 도란도란 모여 같이 밥을 먹고, 거실과 내 방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함께 먹는 밥,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잠을 잤던 수많은 밤은 나에게 끊임없이 환대의 방식을 고민하게 해주었다. 그 경험들은 나에게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실현하게 해주었고, 그 이후를 상상하게 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경험을 소중하게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마 언제까지고 내 인생에서 물음표집 이야기는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이쯤 되서 2호집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앞서 계속 이름이 나왔듯 1호집은 그린집이었다. 그리고 3호집은 고집인데, 그건 3호집을 처음 구한 구성원이 집사라서 고양이집을 줄인 명칭이었다. 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1호집에 살던 구성원 중 한 명이 고양이와 함께 살고 싶어 했고 1호집에서는 그것에 대한 합의가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임시보호 하듯 2호집에서 임시 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정기회의를 통해 새로운 3호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1호집과 2호집 인근에 새로운 3호집을 구했다. 3호집 고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집이 너무 쉽게 만들어 졌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느슨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넓히고 싶었던 주거공동체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주거공동체이지만, 각각의 주거공동체는 다 다른 특징을 가졌다. 내가 살았던 2호집은 어땠을까? 서로 다른 이들이 같은 목적이라면, 같이 사는 것이었기에 “우리도 우리 집 이름을 갖자!”라고 했을 때 조금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멋진 이름을 갖기 전까지 물음표 상태로 두자고 했다. 임시 이름으로 물음표집으로 하자고 했던 것이 어느새 2호집인 우리 집의 정체성이 되었다. 줄여서 물집, 풀어 쓰면 물음표집인 우리 집은 느슨한 규칙과 약속의 집이었다. 무언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합의하기도, 그 합의의 지점을 수정하기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율할 수 있었고 어지간하면 서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지점들이 물음표집의 이름과 잘 어울리는 것이 우린 임시 이름부터 너무 멋진 이름을 만났던 게 아닌가 싶다.
물음표집에 살 때, 많은 경험을 했다. 단순히 방만 나눠 사는 셰어 하우스가 아닌 ‘주거 공동체’란 이름을 가졌던 그곳에서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매년 김장을 해서 나눠먹기도 하고,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며 네트워킹의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구성원들에게 무이자 소액 대출이나 의료비 지원 같은 안전망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또 정기회의를 통해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결혼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가난해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자기만의 방을 가지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하고 맞춰가며 살아가는 방법, 나의 공간에 너를 맞이하고 환대하는 방법. 나는 주거공동체에 살면서 소중한 것들을 배웠다. 비록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오늘도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의 미래를 함께 그리며 살아간다. 정말 고마웠어, 우리의 물음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