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어려운 세계로의 진입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혼자 사는 것도 내 마음대로 다 되는 시간일까 싶지만.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의 사람과 한 집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규칙과 미묘한 감정과 서로를 향한 설득과 수많은 조율의 교차로에 서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그런 어려움이 동반되는 일이다. 나의 살아온 집의 역사를 거슬러 가면서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같이 살기’의 시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산고등학교 시절 기숙사 생활과 이십 대 초반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살았던 명지아파트의 경험이 그 시작들이었다.
원가족 외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 것은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이었다. 학교와 집이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같은 동네는 아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나면 버스가 끊겨서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택시로 이동했다. 고등학교 1년을 그렇게 보내고, 우리는(같이 택시 타던 친구들) 모두 기숙사에 들어갔다. 학교 내에 있는 기숙사 생활이니 택시를 이용하면서까지 집에 가지 않아도 되고, 늦은 밤 이동 시간을 소요하지 않아도 되니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물론 아침에도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게 과연 잘 된 일일까 싶지만.
여하튼,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2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한 학년에 문과 두 개, 이과 1개 총 세 반이 있는 시골의 작은 학교이었기에 기숙사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나의 건물에 1층에는 남자가, 2층에는 여자 학생들이 생활했다. 서로가 다 알고 규모도 작아서 대체로 어울리는 무리들이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아마 배정을 그렇게 고려했으리라) 나는 그 당시 같이 글짓기 대회를 나가며 친해진 친구와 함께 방을 사용했고, 4인 1실이어서 2명은 한 학년 아래 1학년 후배들과 사용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기숙사 체질이었어!’ 라고 말하지만, 그건 이후 생활하는 방이 이동되어서 그럴 것이다. 잘 모르는 후배들과 한 방을 쓰는 것은 그리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선배인 나와 친구를 어려워했던 것부터 나 역시 낯선 이들과 생활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임의로 방을 바꿨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임의로 방을 바꾼 게 아니라 무작정 다른 방에 기생했다. 그 당시 나와 어울리는 친구들과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 4명이서 같은 방을 쓰게 됐는데, 나는 그 방에 이불을 들쳐 업고 살기 시작했다. 사실 같은 방을 쓰던 친구도 같이 기생해서 4인실 방에 6인이 살게 되었다. 나와 친구가 이불을 들고 함께 살기 시작한 방은 2층 기숙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왼쪽 첫 번째 방이었다. 그 방의 룸메이트들이었던 친구들은 우리를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같은 반인 친구들이 존재하고, 같이 밥도 먹고, 하교 후 생활하는 공간도 같으니 우리의 고등학교 생활은 시험 스트레스와 대학 입시 고통 속에서도 하루하루 즐거웠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늘 바지런한 친구들 덕분에 아침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학교 급식이 나오니 기숙사 생활은 그간 내가 해보지 못한 제때 끼니를 먹을 수 있는 생활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기숙사에서 함께 살아갔다.
생활하는 공간도 같고, 공부하는 학교도 같은 우리는 그야말로 원가족과 살던 때처럼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원가족 외에 이렇게 가깝게 살아본 경험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루의 시간을 더 많이, 더 밀착하며 보내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샤워를 하고, 같이 빨래를 하고, 같이 공부를 하고, 같이 놀고, 같이 음악을 듣고, 같이 비밀을 나누고, 같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같이 웃고 울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통스런 비밀을 그 친구들에게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집이 아니라 고등학교 그리고 기숙사에서 안정을 찾고, 안전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었다.
사회운동을 하며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과 매일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집에 하우스메이트가 됐던 시절이 나의 인생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이 없는 삶의 처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나의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분리 없는 함께하는 삶은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그때부터 같은 사람들과 나의 삶의 다채로운 부분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쌓아왔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우리의 공동생활도 마무리가 되었다. 아빠와 살던 나는 거주지를 옮겨 엄마와 살게 되었다. 도시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생활로의 시작이었다. 내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에 입학했던 스무 살, 나는 대학이 아닌 회사로 매일 출근했다. 단 한 번도 대학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열아홉의 학생은 일 년 후,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12시간씩 일을 하고 때론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다시 원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 뒤인 스물한 살 때였다. 대학 입시 준비라는, 결국은 거창하기만 했던 목표를 품고 광주광역시로 거주지를 옮겼다. 초중고를 모두 같은 곳을 나온 친구들 셋이서 한 집에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과는 기숙사 방도 함께 썼던 사이였기에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은 한 친구의 부모님이 광주에 마련한 24평대 아파트였다. 세 친구가 이미 셰어하고 있던 명지아파트에 마지막으로 내가 추가 입주하여 셰어하우스 구성원들이 완성되었다. 친구 부모님이 소유한 집이었기 때문에 따로 집세가 들지 않는 매우 큰 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혼자 살기에는 어림도 없을 소액의 생활비를 내며 함께 살았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살았던 명지아파트에서의 1년은 무척 재미있었고,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고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친한 관계라고 전제되어서 상처 받을까봐 하지 못한 말들이 있었고, 간과한 지점들이 있었다. 서로를 위해 한 배려가 오히려 힘듦이 되거나 눈치가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어달리기 하듯 같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을 했고, 같이 도서관에 다녔다. 같이 영화를 보았고, 같이 밥을 해먹었고, 화요일 밤이면 거실에 나란히 누워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는 친밀하고 좋아하는 친구 관계였다.
그러나 그런 관계에도 각자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약속과 규칙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그게 누가 됐든 누군가와 같이 살아가는 것에는 즐거움만 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오는 불편을 해소해가기 위한 절차와 방법들이 있어야 한다. 명지아파트에서 산 경험을 했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